'N's Briefcase'에 해당되는 글 369건

  1. 우디 앨런 | 스윗 앤 로다운 Sweet and Lowdown (1999) (3) 2010/08/31
  2. 김성호 | 그녀에게 (2010) 2010/08/28
  3. 전계수 | 뭘 또 그렇게까지 (2009) (2) 2010/08/28
  4. 이준익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 2010/08/28
  5. 앤디 비클바움, 마이클 버나노 | 예스맨 프로젝트 The Yes Men Fix The World (2009) 2010/08/19
  6. 김상진 | 주유소 습격사건 2 (2010) 2010/08/19
  7. 가이 리치 | 셜록 홈즈 Sherlock Holmes (2009) (2) 2010/08/05
  8. 윤종찬 | 나는 행복합니다 (2008) (1) 2010/08/04
  9. 던컨 존스 | 더 문 Moon (2009) (2) 2010/08/03
  10. 박신우 | 백야행 (2009) 2010/08/02
  11. <아바타> 단평 (6) 2009/12/12
  12. 아이언맨이 돌아온다! (3) 2009/12/10
  13. 강동원 흥행의 법칙 (6) 2009/12/10
  14. "그런 사랑 믿고싶어 영화만든다" 박진표 감독 인터뷰 (2009. 9. 23) (1) 2009/11/20
  15. 벤슨 리 | 플래닛 비보이 Planet B-Boy (2007) 2009/11/15
  16. 존 키츠(John Keats) 잡담 (5) 2009/10/21
  17. 제인 캠피온 | 브라이트 스타 (2009) 단평 (4) 2009/10/10
  18. 이송희일 감독 인터뷰 (2008. 6. 9) 2009/10/01
  19.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감독 인터뷰 (2008. 5. 9) 2009/10/01
  20. 김응수 감독 인터뷰 (2008. 3. 27) (2) 2009/09/28
  21. 신동일 감독 인터뷰 (2008. 3. 24) (2) 2009/09/24
  22. 초대합니다! 인디포럼 채무변제 파티 - 그렇다면 십시일반 (1) 2009/09/07
  23. 안느 퐁텐 | 코코 샤넬 Coco avant Chanel (2009) (2) 2009/09/04
  24. 스티븐 소머즈 | 지 아이 조 : 전쟁의 서막 G.I.Joe : Rising of Cobra (2009) (4) 2009/08/12
  25. 신정원 | 차우 (2009) (6) 2009/07/27
  26. 파브리스 뒤 웰즈 | 빈얀 Vinyan (2008) (1) 2009/07/24
  27. 7월 인디포럼 월례비행 :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2009/07/23
  28. 이종용 | 여고괴담 5 : 동반자살 (2009) (3) 2009/07/23
  29. 필 클레이든 | LVK Lesbian Vampire Killers (2009) 2009/07/20
  30. 신동일 | 반두비 (2009) (10) 2009/07/14

Sweet and Lowdown

으하하하 이 포스터!

우디 앨런 감독의 1999년작 <스윗 앤 로다운>은 가상의 천재 재즈 기타리스트 에밋 레이(션 펜)의 변덕스러운 삶을 그린다. 재즈 역사가는 물론, 재즈광으로 잘 알려진 우디 앨런 감독 자신까지 나서 그들의 인터뷰 증언장면과 일종의 '재현' 화면을 교차시켜 일종의 페이크 다큐 기법을 도입했다. 션 펜이 그려내는 에밋 레이는 자신이 세계최고라는 자부심, 그리하여 "예술가라면 응당 이래이래야 한다"는 허세의 자부심이 컸던 만큼, 당대 최고라 알려진 장고 라인하르트에 대해서는 끝없는 열등감과 경외를 가지며 이른바 '열폭'하곤 했다. 에밋 라이의 삶을 증언하는 이들에 의하면, 그는 파리에서 장고의 연주를 들으며 두 번이나 그만 기절을 해버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물론 천재 예술가들의 여자들과의 스캔들은 대중의 가장 큰 관심사일 터. 에밋 라이는 "나는 예술가니까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아, 자유로워야 하니 결혼은 안 해" 따위의 말들을 주절거리며 여자들과 연애는 하되 책임감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피했다. 즐기는 건 좋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라는 거다. 많은 여자들과 그런 식의 연애를 이어갔던 것으로 설정되지만,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해티(사만사 모튼) 및 블랜치(우마 서먼)와의 관계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블랜치는 한편으로 해티를 돋보이게 하는 한편, 레이가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기만을 깨닫게 하는 일종의 '계기'로 작용하는 좀더 기능적인 인물이다. 해티가 어릴 적부터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였던 반면 블랜치는 끊임없이 노트에 기록을 하는 작가지망생이다. 고아 출신으로 세탁부였던 해티와 달리 블랜치는 명성과 돈이 있던 가문의 여성이었던 점도, 해티가 레이를 숭배하며 그럴 어린아이같은 심성으로 사랑했던 것과 달리 블랜치가 매순간 레이를 분석하려 들며 그와 일종의 줄다리기 게임을 즐겼던 점도 해티와 블랜치가 얼마나 극명한 극을 이루는 사람들인지 잘 드러내는 특징들이라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해티는 변덕스러운 레이에게 하룻밤새 버림을 받지만 블랜치는 그 자신이 레이에게 배신을 때린다.

그러나 이런 식의 줄거리 요약이 <스윗 앤 로다운>의 아름다움과 근사함을 특징지어주는 요소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이 언제나 천착했던 남과 여의 관계, 또 한편으로는 예술가와 그의 팬의 관계를 버무리면서, 그 특유의 유머와 신랄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작품이다. 영화 전반을 통해 우리는 허세와 연약함, 자만심과 가련할 정도의 열등감과 자기 방어 기제, 빛나는 재능과 어이없을 정도의 어리석음을 함께 갖고 있던 '에밋 레이'라는 인물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디 앨런 특유의 신랄한 유머와 션 펜의 탁월한 연기 덕에, 관객의 입장에선 그를 한심스러워하며 조롱의 비웃음에 동참하게 되면서도 동시에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연민을 함께 품게되는 것이다. 그건 그가 언제나 무대 위 빛나는 별이 되고 싶었으되, 태생적으로 어둠과 진창에서 태어났고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심지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렇기에 그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에서만 투쟁적이었으며, 그럼에도 그런 투쟁의 삶은 언제나 너무나 쉽고도 허무하게 여자와 자고 싶다거나 차를 사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너무나 가볍게 바람에 흩어지곤 했다.

Sweet and Lowdown

사만사 모튼과 션 펜.

자신의 거울과도 같은 사람과의 연애와 상처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이미 너무 늦어버린 사람의 가치를 깨닫는 어리석은 남자의 이야기야 이 우주에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넘치도록 넘친다. 재능은 지녔으나 그 재능을 유지해줄 성실함은 없고 더욱이 자만과 허세가 하늘을 찌르던 예술가의 추락, 그것도 처음엔 서서히 진행되다 점점 가속도를 더해 막판엔 겉잡을 수 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그 자신은 너무 늦은 뒤에야 그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역시 세상에 흔하게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우디 앨런은 <스윗 앤 로다운>에서 옛날옛적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꾼들이 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도, 그 안에 자신만의 독특한 숨결을 불어넣는 데에 성공한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빛나는 듯하다 대공황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이 퇴색했던 미국의 그 20년대와 30년대를 그 빛나는 재즈 음악으로 한껏 되살려내고,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어리석은 한 남자를 통해 예술과 삶과, 사랑을 되짚는 것이다. 이후 2000년대의 우디 앨런의 영화들이 여전히 매력은 있지만 어딘가 예전의 우디 앨런답지 않은 맥빠진 면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에게 있어서도 가장 찬란히 빛난 뒤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든 그의 영화예술 세계의 가장 마지막으로 빛나는 정점에 있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ps 1. 이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의 2010 시네바캉스의 상영작으로 상영되었다. 99년경 헐리웃 리포터 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처음 접하고 수입개봉만을 기다렸으나, <브로드웨이를 쏴라> <마이티 아프로디테>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등이 개봉되고 있던 와중에도 이상하다시피 수입되지 않았던 걸작.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10년을 기다려 본 셈이 된다.

ps 2. 기타를 부숴버린 채 망연히 앉아있는 션 펜의 모습을 부감으로 잡은 거의 마지막 숏은 역시 명불허전, 백문이 불여일견.

ps 3. 당연한 얘기지만, 음악이 너무 좋다. 중간중간 같이 재즈 잼을 연주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역시나 너무 좋다.

ps 4. 션 펜 오빠 만세! 아울러, 역시 허세와 허영으로 가득찬 블랜치의 모습을 매우 매혹적으로 그려낸 우마 서먼도 뜻밖에 우디 앨런 영화에 아주 잘 어울리는 언니였다는.

ps 5. 2000년대에 우디 앨런이 함께 작업했던 주요 배우 중 그나마 우디 앨런 영화에 잘 어울렸던 이는 스칼렛 요한슨 한 명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니 우디 앨런도 요한슨과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함께 작업했던 거겠지만. 사실 이 영화의 사만사 모튼도 우디 앨런의 영화와는 묘하게 불균형을 이루는데, 사만사 모튼이 맡은 해티 역은 워낙에 그런 불균형이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경우라 해야 할듯. 사실 2000년대 우디 앨런 영화 중 최악의 미스캐스팅은 역시 <애니씽 엘즈>의 제이슨 빅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ps 6. 그러므로 결론은... 역시 션 펜 오빠 만세!

2010/08/31 03:18 2010/08/31 03:18

그녀에게

이 허한 포스터 감성 어쩔 거야;;

조너선 캐럴의 『웃음의 나라』는 마셜 프랜스라는 동화작가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한 남녀 한 쌍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던 작가가 평생을 보냈던 마을에 도착하지만, 곧 그 마을의 무서운 비밀을 알게 된다. 꽤나 충격적인 반전과 장면이 포함된 이 소설을 읽고, 허구의 창작이야말로 신의 천지창조를 흉내낸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창세기에서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따고 생령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모든 창작자들도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들의 소소한 설정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 환경, 그리고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에 반영하면서, 점차 보이지 않는, 그러나 우리의 물리적 세계를 꼭 닮은 허구의 세계가 형태를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떤 창작자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캐릭터를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끌고가지 못하게 된다. 대신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들이 스스로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행하는 선택들을 그저 뒤좇게 된다.

그러고 보면 바벨탑 이야기가 ‘언어’의 흩어짐으로 끝을 맺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후대의 신학자들은 바벨탑 이야기를 ‘신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들’에게 신이 내린 징벌로 해석한다. 그리고 테드 창 같은 작가는 오히려 “신을 경배하고자, 그래서 신을 닮고자 만든 것”이라는 전복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물론 나는 테드 창의 해석이 좀더 마음에 든다. 나아가 바벨탑이 그저 높이만 높은 탑일 뿐 아니라, 실은 소설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도서관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인간 복제나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보다도, 허구의 창작야말로 신의 영역을 넘보는 모방 행위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재능이 있든 없든, 사춘기 적 한번쯤은 소설 습작을 해보고, 고통과 무력의 시기에 한번쯤은 시나리오를 써볼 궁리를 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성호 감독의 영화 <그녀에게> 역시 허구를 창조하는 창작자의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배우 미팅을 위해 부산에 내려가는 한 영화감독과, 실명(失明)을 앞두고 오래 전 버린 딸을 찾아가는 중년의 사진가를 교차하며 시작한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를 고쳐쓰다 부산의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묘령의 신비로운 여자와 만나 그녀와 동행하게 된다. 한편 전화번호가 적힌 낡은 사진 한 장만을 들고 딸을 찾는 중년 남자는 필사적으로 딸의 행방을 좇지만 좀처럼 그녀를 만날 수 없다.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평행하게 달리며 서로 교차되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엮이기 시작한다.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여자가 들려주는 사연을 자신의 시나리오에 반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여자의 사연이 밝혀질수록, 초반에 제시됐던 영화감독의 사연이 하나씩 거짓으로 판명될수록, 영화 안에서 이야기와 현실, 실제와 허구가 뒤섞일 뿐 아니라 시간까지 뒤섞인다. 주인공인 영화감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섞인 채 한 영화 안에 여러 개의 이야기로서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러 개의 이야기가 다시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그녀에게

여배우가, 내가 좋아하는 서늘한 인상의 미녀다. 그러나 실제로 본 인상은 또 좀 다르더라는.

<그녀에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시나리오를 쓰던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여자를 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결국 창작자가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주인공을 붙잡는 장면으로 판명난다. 자신이 피조물에게 그런 고통과 상처를 주었고, 그 자신이 그녀가 사고를 당하도록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나 그녀가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 아니 그가 그 장면을 쓰던 그 순간, 그는 스스로 깜짝 놀라 키보드를 내던지고 이야기 속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는다. 이건 뒤집어 말하면, 결국 고통과 눈물의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의 상처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인 되는 셈이다. 어쩌면, 인간을 연민한다는 신의 마음이 저런 것일까. 제가 만들고 제가 안겨준 고통이면서, 막상 그 고통에 힘겨워하는 인간을 보면서 연민과 고통을 경험하는 것일까, 신이란 존재는.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신이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흩뜨려놓긴 했으나 문학을 포함해 허구 자체를, 나아가 예술 자체를 파괴하지 않은 이유가 무얼까에 생각이 미친다. 신을 닮고 싶어하는 인간의 그 가련한 욕망에 결국 연민을 품어버린 것일까. 이 세계를 창조한 자신들의 영광을 기리는 것이니 그냥 관대하게 굴자고 마음먹어서인 걸까. 혹은, 인간이 허구와 예술을 즐기다가 어느 순간 신을 이해하는,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의 순간을 맞기에 그냥 고이 내버려둔 것일까.

그런데 김성호 감독은 이 영화를, 애초에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로 일단 찍어놓고 나중에 편집을 통해 이야기를 짜맞췄다고 한다. 어쩌면 신도 이 세상을 만들 때 실은 아무 계획없이 창조의 욕구 때문에 무작정 만들고 본 게 아니었을까 싶다. 완벽한 조물주가 만들었다고 하기엔, 빈 틈이 너무 많은 우리 세상이 아닌가.


+ 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독립영화데이터베이스 페이지 중 '독립영화 초이스'에 기고한 글. (2010. 3. 10)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새 창으로 열기)할 수 있다.

ps . 이 영화 역시 한국 주요도시 관광홍보 프로젝트인 '영화, 한국을 만나다'의 부산 편으로 제작된 영화다. 영화제 때문에 매년 내려가고 1년간 살기도 한 곳이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풍경들은 "부산에 정말 저런 이국적인 곳들이 있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생경하고 이국적이다. 이는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씨네21 김도훈 기자의 리뷰(새 창으로 열기)의 언급처럼 '그저 겉멋에 겨운 장소만 모은' 결과일 수도 있지만,... 매년 영화제 때문에 부산에 내려가는 서울 영화인구 반 이상이 부산을 아무리 익숙하게 여기고 안다고 착각한다 해도 실은 부산의 맨 얼굴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 그건 겨우 1년, 그것도 곧 떠날 이방인으로만, 게다가 해운대에서만 살아본 나 역시 마찬가지다 -  이 영화의 분위기가 부산과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물론 철저히 '서울내기' 입장의 폭력적 시선이기도 하다.

ps 2. 영화에서 주인공 영화감독 역을 맡은 이우성은 본업이 배우가 아니라 뮤지션이다. 그룹 코코어의 보컬. 김성호 감독과는 이전에 <판타스틱 자살소동>의 김성호 감독 연출 에피소드에서 협업한 바 있는데, 이 영화에선 그 '어설픈 연기'가 나름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반면 중년 포토그래퍼 역의 조성하는 연극판에서 뼈가 굵은 안정된 연기력의 배우. 

ps 3. 글 말미에서 밝힌 대로 시나리오 없이 일단 무작정 찍고 편집실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낸 영화라고 하는데, 그런 영화치곤 아귀가 제법 잘 맞고 일관성도 또렷하다. 하지만 덕분에 전주영화제에서 첫 상영되기 직전까지도 편집이 이뤄지고 있었다나 어쨌다나. 이 영화의 일부 장면 역시 캐논 5D Mark II의 동영상 기능으로 촬영되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이우성의 차를 부감으로 따라가는 장면이 그 장면인데, 전주에서 상영 당시 이 장면은 화면 일부가 깨지며 픽셀 일부가 확대된 것같은 부분이 있어 아쉬웠다. 그나저나 이 장면은 헬리콥터...가 아니라 경비행기에 촬영감독이 타서 촬영한 장면이라는데, 촬영 직후 비행기가 추락;;;해 촬영감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2010/08/28 15:10 2010/08/28 15:10

뭘 또 그렇게까지

포스터도 촌스럽지만, 저 70년대스러운 카피라니.

기차 안에서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을 읽고 있던 촉망받는 젊은 화가 조찬우(이동규)는 춘천에서 열리는 미술학회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는 중이다. "얼른 춘천역에 와서 치킨집 술자리에 합류하라"는 독촉전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동적으로 김유정 역에서 내린다. 그리고 역시 '김유정'이라는 이름을 지닌 젊은 미술학도 여성과 만난다. 젊고 예쁜 여자가 자신을 존경한다며 "선생님, 선생님"하며 졸졸 쫓아다니니, 우리의 속물 예술가 조찬우는 어깨에 힘을 좀 주며 그녀를 꼬시고 싶다. 조찬우의 눈에는 김유정 역시 그걸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영화가 흥미로운 반전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니체'를 권하며 잘난척을 하던 조찬우의 '권위'가, "실은 고등학생 때 니체는 다 읽었다"는 유정의 말에 순식간에 뒤집히는 것이다. 거기에 조찬우는 유정을 스토킹하던 젊은 감독지망생 민호에게 '쫓기며'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후 영화는 단순히 한 여자와 두 남자를 둘러싼 소동만으로 코미디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관계와 태도를 통해 '자연'과 '예술'에 대한 담론으로 비약한다. 민호가 찬우에게 술대결을 청하며 들려주는 유정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름 신빙성 있는 '근거'들을 지니고 있지만, 이야기 자체가 기괴한데다가 민호라는 인물도 부담스러울만치 과잉된 자의식으로 뜬금없는 행동을 일삼는 캐릭터다. 곧 우리는, 그녀가 유정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 역시 실은 민호가 제멋대로 구성해 믿고있는 이야기들일 수 있다고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진술이 자연과 예술에 대하여 찬우가 유정에게 흘리듯 던졌던 말들, 그리고 세미나에서 토했던 열변들이 유정에 대한 기괴한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유정이란 인물은 다층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녀는 찬우가 낯선 곳에서 만난 그저 신비한 여인일 수도 있다. 민호의 말대로 기괴한 믿음과 행동을 일삼는, '어른 남자 찜쩌먹는 무서운 어린 여자아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또한, 찬우가 '예술'과 '자연' 개념을 그대로 육화한 존재이기도 하다.

'예술가'로서 찬우에게 '유정'은 처음엔 손을 내밀면 닿을 것 같은 '예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가 감히 통제하기는커녕 어찌할 수도 없는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로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민호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영화 역시 유정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찬우는 홍상수 감독의 남자캐릭터들과 달리,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기보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그에 복종하는 인물인 것 같기는 하다. 빈 호텔방에서 잠을 못 이루던 찬우가 '유정이 즐겨 한다던' 백팔 번 절하기를 하는 코믹한 장면이 바로 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될 것이다.

뭘 또 그렇게까지

영화의 클래이맥스를 이루는 공간은 젊은 예술가들의 축제가 열리는 공간이다. 애초 '춘천'이라는 도시를 알리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이 영화는 찬우와 유정의 동선 뒤로 춘천의 유명한 명소들을 배치해놓는 한편, 춘천을 대표하는 음식인 막국수와 닭갈비를 화면에 반복해서 등장시킨다. 그러나 <뭘 또 그렇게까지>가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춘천의 얼굴이라면, 서울과는 또 다른, 언제나 젊은 예술가들의 활기로 넘치는 '예술의 도시'로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영화와 음악, 춤, 판토마임, 행위예술, 그림 등 모든 장르의 예술이 어우러진 이 축제에서 찬우는 비로소 자신의 맨얼굴을 보게 될 뿐 아니라, 민호로 상징되고 있는 자신의 과거를 직시한다. (민호와 찬우는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이다.) 그리고 삐딱한 냉소와 비웃음이 몸에 배 있던 찬우는 비로소 이곳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고 겸허한 자세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후에 또 한 번의 반전을 준비한다. 찬우가 마침내 유정에게 다가갈 수 있겠다고 느꼈을 법한 순간, 유정은 다시 그의 이해와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예술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유정에게 짓는 찬우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인상적이다. 그 얼굴이야말로, 예술 언저리에서 밥을 먹으며 예술을 좀 아노라 하는 우리 모두가 가장 두려워할 순간의 얼굴일지 모른다. 우리가 원하고 희구하는 그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진실을 맞닥뜨리는 그런 순간이니까. 하지만 이 글을 유정이 읽는다면,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을 할 것 같다. "뭘 또 그렇게까지 이 영화를 보셨어요?"라고.



+ 프레시안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린 글. (2010. 4. 24)

ps 1. 캐논이 내놓은 DSLR 카메라인 OD 5D Mark II의 동영상 기능으로 완성된 전세계 최초의 영화. <하우스>의 몇 시즌이더라... 하여간 그 시즌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바로 같은 기종으로 전체가 촬영된 바 있다. 현장에서 제대로 모니터도 못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 초점이 빗나간 장면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기대 이상의 화질을 보여준다.

ps 2.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영화, 한국을 만나다'라는, 한국의 주요도시 다섯 곳에 대한 일종의 '관광홍보' 차원으로 기획된 시리즈 중 춘천 편이다. 부산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처음 상영됐을 때 보면서 관광홍보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영화 그 자체로 재미있으면서도 춘천의 명소와 춘천을 대표하는 키워드가 모조리 등장하는 것을 보며 감탄했던.

ps 3. 불쾌하기 짝이 없는 '90년대 홍상수 영화들'에 대한 아주 통쾌한 복수...라고 생각해서 이 영화를 더욱 좋아한다. 그러나 정작 전계수 감독은 이 영화가 "내 자식 같지 않다"고 한다. 전계수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이 이야기를 듣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란. 인터뷰를 보시려면 여기(새 창으로 열기)로.

2010/08/28 00:26 2010/08/28 00:26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본 포스터보다 멋진 티저 포스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조선시대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하는 정여립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이후 그가 조직했던 대동계의 향방을 두고, 왜구의 침입이 가시화되고 있음에도 이에 전혀 대처할 수 없는 "썩어빠진 조정을 쓸어버리려는" 이몽학(차승원)과, "대동계를 이용해 자신이 왕이 되려는 이몽학을 저지"하기 위한 황정학(황정민)의 추격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한신균을 아버지로 두었으나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고 방황하던 견자(백성현)가 이몽학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난 뒤 복수를 위해 황정학과 동행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기축옥사를 일으켰던 당시 극심했던 동인과 서인 간 정쟁이 영화에서도 (그저 정여립의 죽음을 설명하는 기능적 측면을 넘어서서) 매우 코믹하지만 결정적인 몇 장면으로 묘사된다. 다만 실존인물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회원을 받고 정기적인 무술훈련도 병행했던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끌어오되, 실제로 정여립이나 대동계와는 별 관련이 없었던 이몽학을 정여립의 제자이자 대동계 회원으로 설정한 데에서 상상력이 발휘됐다. 이몽학이 정여립과 대동계로 연결되면서 이몽학의 난이 실제 역사보다 4년 정도 앞서서 임진왜란 직전에 일어난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영화를 이끄는 두 주인공인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비에 있다.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이몽학이 주로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절도있는 말과 동작을 보여주는 '직선의 미'라면, 남루한 행색으로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는 소경 검객인 황정학은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능청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일관하는 '곡선의 미'다. 맹인 검객이라는 면에서 얼핏 '자토이치'의 인상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영화 속 황정학은 오히려 <스타워즈>의 장난기 많은 괴짜노인 요다나 <취권>의 사부 쪽에 가까운 성격을 드러내 보인다. 이몽학과 황정학이 마침내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근래 액션영화들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정반대로 '슬로우 모션' 액션으로 표현돼 다른 종류의 시각적 쾌감을 준다. 길게 이은 중심컷을 슬로우로 표현하되 그 앞뒤에 짧고 빠른 연이은 컷들을 붙이는 식으로 동양 무협액션의 아름다운 곡선의 동선을 최대한 살리고 표현하는 것이다. 칼과 칼이 부딪히는 무협액션의 쾌감을 잘 살린 이 씬은 가히 영화의 클래이맥스라 할 만한 장면이다. 두 시간이 조금 안 되는 러닝타임 안에 사건과 이야기의 흐름을 안정적으로 쌓아가는 호흡 좋은 플롯 구성도 영화의 강점이다. 촬영과 편집, 연출의 호흡, 그리고 지나치게 과용하지 않으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있는 음악도 나무랄 데가 없다.

<황산벌>과 <왕의 남자>에서도 드러났듯,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도 이준익 감독은 '권력'에 대해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시선을 그대로 견지한 채, 권력다툼의 와중에 일어나는 '난'이 빚는 끔찍함과 허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이 가장 적극적으로 투영된 인물이 바로 황정학이다. 그는 권력이나 대동계가 가진 '힘'에 초연한 채 반 거지행색을 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생물학적 아버지를 잃은 견자에게는 이상적인 스승이자 실질적인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전 작품들과 달리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권력을 사유하는 인물, 혹은 권력의 유혹 앞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의치가 너무 부담스러웠던. 혁명가이자 야심가이기도 했던 이몽학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야심만 도드라진다.

임진왜란을 피해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가버린 후 텅텅 비어버린 궁에 도착한 견자는 근정전 안의 왕좌에 앉아본다. 이 순간 관객들은 영화 초반, 서자라는 이유로 반항을 일삼던 견자에게 한신균(견자의 아버지)가 던져줬던 "지금 이 나라 왕도 서자 출신"이란 말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에서는 별로 강조가 되지 않았으나 이몽학 역시 실제 서얼 출신이었고, 그는 영화의 초기부터 왕이 되려던 야심을 숨기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권력에의 의지를 드러내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 역시 '너무 쉽게 입성한' 한양의 텅 빈 궁에 도착한 뒤, 허탈한 표정으로 근정전 앞마당에서 칼을 끈다. 그리고 견자는 이몽학을 맞아 "겨우 여기 앉으려고 그 많은 피를 흘렸냐"고 비난을 함으로써, 자신이 이몽학이 아닌 황정학의 길을 선택했음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왕의 남자>의 연산군조차 자신의 의지보다는 주변에 떠밀린 채 현실도피를 하는 듯한 인물로 그려졌고, '권력의 맛'을 알게 된 공길도 견자만큼 '적극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은 아니었음을 떠올렸을 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의 인물들은 이전의 이준익 감독의 인물들과 일관되면서도 어딘가 달라진 면모가 있다.

아쉬운 것은, 그 '다른' 면모가 제대로 입체성을 갖고 영화에서 발휘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인물들은 매우 단선적이고, 이 때문에 각기 정해진 방향으로 앞만 보고 내달린다. 이몽학은 고뇌를 지닌 혁명가라기보다는 그저 야심에 날뛰는 악당으로만 보이고, 그런 이몽학과 대척점을 이루는 황정학은 '너무 당연하게 옳기에' 오히려 "이몽학을 견제하기 위해 어린 소년의 치기어린 복수심을 이용하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관객의 입장에서 가장 감정이입을 할 만한 인물이자 실질적인 화자는 응당 견자가 돼야겠지만,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립구도에 지나치게 눌리는 데다 무작정 분노와 반항기를 내보이며 '버럭대기만 하는'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이몽학과 견자의 연결점이 되는 인물인 백지 역시 존재감이 약한 편으로, 이몽학과 백지 사이의 멜로 역시 다소 성기게 표현된 편이다. 이 때문에 인물들이 전면적으로 충돌하는 영화의 말미는 아드레날린의 폭발은 있되 가슴벅찬 감동이나 카타르시스는 기대하기 어렵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멘토로서의 황정학은 황정민에 의해 아주 매력적으로 재현되기는 했으나, 정작 그의 명분과 철학엔 별 입체감도 깊이도 없다.

영화의 클래이맥스를 이루는 이몽학과 황정학의 칼싸움, 그리고 이것의 '변주'인 이몽학과 견자의 칼싸움은 서로 팽팽하게 대립했던 상대와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이자 동시에 그랬던 상대에 대한 이해와 인정, 그럼에도 각자의 '다른 선택'이 엇갈리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간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인물들이 비로소 상대를 거울삼아 자신의 맨얼굴을 보는 장면이기도 하고, 그들이 시종일관 숨겨왔던 번민과 의심, 회한과 아이러니와 연민이 비로고 균열의 얇은 틈을 뚫고 새어나오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들은 관객에게 채 도달할 새도 없이 곧바로 공중에 흩어져 버리고 만다. 각자 앞만 보고 달려온 인물들이 마침내 일생일대의 대결을 펼치며 장렬히 산화하는 동안, 관객들은 그저 이들의 싸움을 '구경'만 하는 입장이 되기 십상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모처럼 꽉 짜이고 안정적인 이야기와 구성과 화면으로 두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영화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의 전작들에서 언제나 이야기를 이기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사람'의 온기 - 그것이 다소 이상적인 방향으로 단순화된 면이 있었을지언정, 그리고 언제나 동의를 받지는 않았을지라도 - 가 이 영화에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은 언제나 특유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힘, 무엇보다도 '사람'의 온기로 이런저런 소소한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무수하고도 뛰어난 장점들 가운데 그리 많지 않은 단점이 유난히 도드라지게 눈에 와서 박힌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분명 긴장과 재미를 느꼈음에도 극장을 나오면서는 허탈감과 아쉬움, 답답함이 더 컸던 이유다.




+ 프레시안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렸던 글. (2010. 4. 20)

ps1. 원작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보면서도, 이 이야기는 틀림없이 견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배우며 그의 눈에 비친 이몽학과 황정학의 모습일 거라 짐작했고, 그게 맞게 이야기를 푸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립구도를 강조하다보니 견자를 어정쩡한 위치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안습이었던 주연급 인물은 아무래도 백지. 이준익 감독은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데에 여전히 서툰듯.

ps2. 조정의 신하들이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고 얄팍하게 희화화되는 걸 보면서 어이없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아주 소박하면서도 대중적인 이런 식의 냉소주의는 하나도 건강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솔직히 그 조정 신하들이 아니라 이 영화의 그런 태도야말로 가장 유치하고 우습게 느껴진다. 그런 태도는 내용없는 불신과 근거없는 무력감과 무관심만을 만들어낼 뿐, 정확한 비판이나 풍자나 조롱이 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순간적인 웃음에 머무를 뿐 진짜 쾌락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는 이처럼 깊이 없이 얄팍한 대중적 정서가 영화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잡고 앉아있는 경우가 많다.

2010/08/28 00:14 2010/08/28 00:14

The Yes Men Fix The World

멀쩡하게 생긴 일련의 사람들이 WTO같은 세계적인 기구부터 엑손, 다우와 같은 글로벌기업, HUD(미국주택개발공사) 같은 국가 공기업의 대변인을 사칭하며 '사기를 치고 다닌'다. 공명심에 휩싸여 웬 이상한 걸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 경쟁하는 얼빠진 악동들일까? 방송에 이름이 나기만 한다면 무얼 해도 좋다는 괴짜들일까? 하지만 세계적인 대기업인 다우의 대변인을 사칭해 무려 영국 국영방송인 BBC 생방송에 출연해서 "인도 보팔 사태의 책임을 지고 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발언을 한 뒤 두 시간만에 들통이 났을 때, 그 장난의 주연이었던 앤디 비클바움은 자신을 찾아온 BBC의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거짓말은 불과 두 시간이었지만, 보팔을 방치하고 버려둔 다우의 거짓말은 20년을 끌었다."

인도 보팔 사태란, 보팔에 공장을 둔 세계적 화학기업 유니콘 케미컬의 공장이 폭발하면서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유니콘 케미컬은 폭발지역의 오염제거나 적절한 피해자 보상 등을 거의 하지 않은 채 보팔을 방치해뒀다. 유니콘이 '적절한 피해자 보상'을 딱 한 번 했던 것은, 미국 텍사스 주의 주민들이 집단 소송을 걸었을 때 뿐이었다. 폭발사고가 나고 17년 뒤 유니콘은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 다우에 의해 인수됐고, 다우 역시 보팔을 외면했다. 예스맨들은 다우가 유니콘을 인수한 3년 뒤, 영국 BBC 방송이 마련한 보팔사태 20주년 특별 생방송 중 프랑스 파리의 BBC 지부에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다우의 대변인'을 사칭해 "다우가 유니콘을 인수할 때부터 보팔에 대한 피해보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보팔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적절한 피해보상에 나서겠다"고 발표한다. 이 발표 직후 다우의 주가는 거의 20억 달러가 폭락하며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으나, 결국 이들의 '사기 사건'은 불과 두 시간 뒤에 들통이 났다.

예스맨들이 골탕먹인 회사는 다우만이 아니다.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가 담은 이들의 6개 활약상 중 첫머리를 장식할 뿐이다. 이들의 활동의 시작은 무려 WTO의 대변인을 자청하는 것이었고, 뒤이어 온갖 군수산업체와 글로벌 대기업, 심지어 미국주택개발공사(HUD)의 대변인을 자청하며 사기극을 벌인다. 방식도 웃기다. 예를 들어 석유에너지 회사들의 국제회의에서는 시치미 뚝 떼고 엑손의 대변인을 자청해서 사기를 쳤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인간의 사체를 제공받은 양초로 무공해 에너지원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군수업체의 심포지엄에서는 환경오염과 온난화로 전지구적 재난이 닥쳐올 것에 대비해 1인 구명장치를 발명했다며 코미디 SF에서나 나올 것 같은 기구를 선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을 더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이 시장만능주의자들의 논리를 차용한 가짜 연설이나 프레젠테이션이 결국 지독하게 비인간적인 방향의 결론으로 흘러가는데도, 컨퍼런스에 참석한 이들이 '매우 진지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위기관리 솔루션을 개발하는 회사의 대변인을 사칭해서는 "자본주의 시대에 위기관리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논리 하에 "나치한테서도 배울 건 배우자"는 결론을 내리며 자본주의 시대 비인간적 시스템을 조롱하는데도, 컨퍼런스나 심포지엄에 참석한 전세계 대기업 관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역겨움이나 도덕적 저항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참신한 사업적 아이디어"라며 이들을 찾아와 앞다투어 명함을 내밀거나, 오히려 "이런 구명장치는 대테러용으로 더 적합하지 않겠는가"는 사업적 조언까지 건넨다.

The Yes Men Fix The World

다우의 피해보상 발표가 거짓말이란 사실이 밝혀진 뒤 예스맨을 향한 보팔 주민들의 반응. 실은 '연출'된 장면으로, 실제로는 매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는 앤디 비클바움, 마이클 버나노 등 예스맨 프로젝트 활동의 주축이 되는 인물들의 활약상 중 6개를 추려 이들이 스스로 연출까지 손을 댄 기막히게 웃기는 다큐멘터리다. 이들이 대기업과 신자유주의 국제기구들을 골탕먹이는 방법들도 너무나 기상천외해서 웃기거니와, 이를 화면에 담고 영화를 진행시키는 방식 역시 지독하게 웃기고 유머러스하게 만들어졌다. 영화의 시작부터 앤디 비클바움과 마이클 버나노가 양복을 입은 채 수영장에 다이빙해 어설픈 포즈로 싱크로나이징을 하면서 자기들을 소개하는 식이다. "다음 타겟은 어디로 할까" 고민하는 장면에서는 폐가 공장 같은 곳에서 TV 한 대를 놓고 양복차림의 두 사람이 쭈그려 앉아있는 식으로 표현되고, 내레이션으로는 어느 기업을 고발하는 '문자'를 받았다면서 정작 화면으로는 쪽지를 붙인 돌이 창문을 깨고 날아오는 것으로 묘사하는 식이다. 거기에 화면에 종종 삽입되는 풍자적인 애니메이션 장면, 이들이 진지한 국제회의와 심포지엄에서 사용하는 프레젠테이션의 풍자적인 3D 자료화면도 배꼽을 잡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유머와 장난의 이면에는, 진지한 문제의식과 끝없는 열정이 있다. 물론 여전히 그들에게 호되게 당한 기업들은 이들을 '사악하고 심술궂으며 어이없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시민사회운동이라고 하면 의례히 거리에서의 격렬한 집회와 경찰들의 폭력, 각종 피켓과 격렬한 구호, 그리고 이면의 법정싸움과 기자회견 등 뭔가 '진지하고 비장한' 것을 떠올리기 마련인 우리들에게 '예스맨'들의 활동은 너무 장난질 같아 한심해 보이거나 당황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활약을 우스꽝스럽게 담은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와 마침 영화개봉과 때맞춰 발간된 동명의 책을 보고 나면, 이들의 활동이 실은 연기 아닌 연기를 하면서 미디어를 철저히 이용하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교묘한 미디어 운동이자 퍼포먼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결국 이것이다. "규제없는 자본주의란 결국 빈익빈 부익부를 가중화하며 소수의 부자들만 배불린 채 다수의 가난한 이들을 절망과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므로 적절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들이 벌이는 장난질은 한편으로 충격이고, 또 한편으로는 신기하다. "운동과 시위를 저런 식으로도 할 수 있다니."라는 놀라움도 준다. 하지만 이들의 유머는 배를 잡고 웃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혹은 변화시킬 게 너무 많은 우리의 현실을 상기시키며 묘한 슬픔과 눈물을 주기도 한다.

The Yes Men Fix The World

권위주의적인 독재정부를 가까스로 청산한지 불과 20년도 안 된 한국, 그 짧은 사이에 심지어 기업 하나가 법과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는 한국, 거기에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보다 신나는 운동'을 고민하면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이전 세대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에서, 어쩌면 이들의 활약은 지나치게 앞선 것이거나 여전히 생경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이것도 미국이니까 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섣부른 패배의식을 느끼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홍보차 직접 한국을 방문한 앤디 비클바움도 스스로 강조했듯, "변화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그토록 '즐겁게 투쟁하는' 앤디 비클바움도 국내 관객과의 대화와 책 <예스맨 프로젝트>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2003년 칸쿤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며 세계화에 저항한 故 이경해 씨를 언급하며 그의 저항에 경의를 바치기도 했다.

결국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란, 어제의 비장했던 투쟁 덕에 오늘의 즐거운 투쟁이 있을 수 있고, 이것들이 쌓이고 쌓여 내일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으로 2008년 11월 당시 예스맨들이 6개월 후의 날짜로 '행복한 뉴스만을 담은' 미래의 가짜 뉴욕타임즈 신문을 만들어 배포한 사건을 담은 것 역시, 그런 '내일에의 희망'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이 장면의 인터뷰에서 <샌프란시스코의 하룻밤>, <더 혼팅> 등에 출연했던 영화배우 릴리 테일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모처럼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강추'를 할 만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 프레시안무비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린 글. (2010. 3. 31)

ps 1. 예스맨들의 활약을 담은 영화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댄 올먼, 새러 프라이스, 크리스 스미스 등 세 명이 연출을 맡은 가운데 마이크와 앤디의 활약을 주축으로 한 <예스맨 The Yes Men>이 완성돼 그 해 토론토영화제와 이듬해 선댄스영화제, 암스테르담영화제 등에서 상영되었고, 비록 한정적 규모나마 북미시장 내 극장개봉도 거친 바 있다. 2003년작 <예스맨 The Yes Men>에 대한 IMDB 페이지는 이곳(새 창으로 열기)이니 참조하시라. 2009년작인 <예스맨 프로젝트 The Yes Men Fix The World>는 <예스맨>의 두 주인공인 마이크와 앤디가 직접 연출과 제작까지 맡아 완성한 일종의 속편격인 영화다. 2009년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면서 미국개봉과 DVD 출시 등도 거쳤다.

ps 2. 실제로 만나본 앤디 비클바움은 영화 속에서처럼 유머감각이 뛰어나긴 하되, 훨씬 사람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유머감각과 함께 겸손한 진지함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몇몇 매체가 함께 한 라운드 인터뷰 자리에 참석했다가 완전 반해버렸다는. 당시 인터뷰는프레시안무비에 이 기사로(새 창으로 열기) 실었다.

ps 3. 예스맨들의 공식 홈페이지는 이곳 : http://theyesmen.org(새 창으로 열기)

2010/08/19 10:28 2010/08/19 10:28

주유소 습격사건 2

1편보다 재미가 덜한.

10년만에 나온 속편인 <주유소 습격사건 2>는 전편만큼 후련한 통쾌감이나 폭발적인 해방감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들에게도 공감을 크게 느끼기 어렵고, 네 명의 캐릭터나 존재감도 무척 약해보인다. 1편에서 노마크, 무대뽀, 딴따라, 뻬인트가 각각의 개성과 또렷한 존재감을 과시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물론 김상진 감독 특유의 액션-코미디 감각은 여전하구나 싶고, 전편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억눌린 괴로움을 풍자하며 웃음을 주기는 한다. 1편의 유머를 활용한 개그들도 그저 '반복'만은 아니어서 노력이 가상해 보인다. 그럼에도 활기와 해방감보다는 오히려 답답하고 어수선한 혼돈만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영화의 실패인가. 아니면 영화 속에 반영된 현실의 실패인가.

주유소와 아무 상관도 없던 노마크 일당이 느닷없이 주유소에 들이닥쳤던 것과는 달리, 이번 편은 주유소의 직원들이 내부에서 주유소를 접수해 버리는 것이 영화의 전제다. 그러니 정확히 하면 주유소를 '습격'한 것이 아니라, '점거'한 것이다. 이 전제에서부터, 그저 전편의 영광에 기댄 안이하고 게으른 속편으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결의가 읽힌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지금의 '비정규직, 혹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20대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보노라면, <주유소 습격사건 2>는 뜻밖에도 근래에 나온 영화들 중 가장 20대들의 처지를 깊숙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면서도, 이를 우울한 절망보다는 떠들썩한 소동극으로 그려내는 드문 영화다.

20대 필자로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확보해 나가고 있는 《뉴라이트 사용후기》의 저자 한윤형 씨는 지금의 20대들에 대해 "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낙오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라고 분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8, 90년대의 20대들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사회체제나 기성의 질서에 저항하는 '루저의 정서'를 지녔다면, IMF 이후의 20대들은 '잉여의 정서'를 지녔다고 지적한다. 이는 사회학자이자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의 저자 엄기호의 주제의식과도 맞닿는 부분이다.

<주유소 2>의 주인공들은 한윤형이나 엄기호가 지적한 바로 그 '20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녔다. 플래시백으로 삽입되는 이들의 과거를 보노라면, 이들은 사회적 모순에 반발심을 느끼고 부모와 기성세대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간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했다가 주저앉게 된 자신의 현실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관객들은 전편의 네 명과 달리 이번의 주인공들에게 크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좌충우돌과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는 20대들을 '단 한 번'의 실수로 영원히 탈락시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우리사회의 생존경쟁을 풍자하는 것이지 않는가. 네 명은 각자 나름의 능력과 장기를 지녔음에도, 주유소 아르바이트 직에 '면접까지 보면서' 응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정규직도 아니고, 심지어 비정규직도 못 되는 단기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전전해야 하는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이나 기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이런 이들이 주유소를 '점거'하는 것은, 박사장(박영규)의 상습적인 임금 체불과 인격모독 때문이다. 이후 이들의 행보는 매우 흥미롭다. 한 명이 그만두자 모두들 연쇄적으로 그만둔 뒤, '받아야 할 돈은 받아야 한다'는 말에 금세 뜻을 모은다. 이것은 전편에서 '그냥' 저질렀던 습격과 달리, 실은 '떼인 돈을 받기 위한' 자기구제이자 점거투쟁이 된다. 결국 '생존권 투쟁'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하룻밤 반값세일로 벌어야 하는 총 목표액을 이들이 각자 받아야할 노동의 댓가의 합으로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자 점거를 푼다. 그 와중 주유소 사무실에 '인질'로 잡혀있던 20대 내레이터 모델 여성들과도 연대를 이루는데, 이 여성들에게 반값세일 이벤트를 홍보하는 내레이터 모델로 협조를 요청한 뒤 그 노동의 댓가를 정확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니저가 아니라 그 여성들 각자에게 직접 돈봉투를 건넨다.

주유소 습격사건 2

네 명의 캐릭터가 균형을 이루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현선과 지현우에 포커스가 더 맞춰져 있다.

더욱이 이들의 관계는 전편보다 오히려 '민주적으로' 발달한 양태를 보인다. 전편에서는 노마크가 리더쉽을 독점하고 딴따라가 이를 보좌하며, 무대뽀는 딴따라에게 툭하면 "꼴통같은 새끼"같은 말을 들으며 일당 내에서도 은근한 무시를 받았다. 뻬인트는 이들 모두와 떨어져서 '혼자 노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2편에서는 이런 수직적인 서열 대신 보다 수평적인 '네트워크'로서의 관계가 관찰된다. 원펀치와 하이킥(조한선)이 보다 전면으로 나서기는 하지만, 이들 네 명은 대체적으로 성격도 장기도 다른 만큼 각자 자신의 영역을 독립적으로 관할하며 수평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에필로그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하룻밤의 소동 이후 전편에서의 네 명이 각자 흩어진 채 미진하나마 나름의 방식으로 꿈을 이루거나 한을 풀었다면, 이번 편에서의 네 명은 어느 영화촬영 현장에 '함께 모여' 단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나마도 짤린 뒤에는 "이제는 뭐할까" 고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도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함께이다. 각자 성격도 장기도 다르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신들이 '뭉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나면 원펀치가 내세우는 "재미있잖아"라는 말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사실 1편에서 노마크의 "그냥"이라는 말은, 구구절절한 사회의 모순과 이들의 억울함과 한을 그저 쿨하게 압축시킨 한 단어였다. 2편의 "재미있잖아"는 그저 단순하고 순간적인 쾌락을 가리키기보다는, 꿈 없는 현실을 버티기 위한 단 하나의 수단이자, 그러한 현실의 '희생자'가 아닌,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초월하는 자'의 덕목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재미'를 일정한 과정을 통해 승화시킨 결과물을 보통 '예술'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결국 주유소를 나온 뒤 다른 곳이 아닌 영화촬영 현장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다 말이 되는 셈이다. 특히 대중문화/예술이 소위 순수 예술을 상당 부분 압도해버린 지금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유소 2>는 20대들의 이상한 생존권 투쟁과 연대를 다루는 소동극이 된다. 그 와중 주유소를 들르는 '손님'으로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술에 취해 억지를 부리는 조중일보의 기자, 어린 여자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허세만 부리는 중년의 소위 '매니저', 인근 주유소의 다른 사장, 법무부 직원으로 변장한 탈주범들(정확히 하자면 본질은 깡패이나 국가권력의 제복을 입고는 이상한 애국심을 강요하는 현재의 국가질서)이다. 전편에서의 풍자대상이 '천민 자본주의' 하의 부르주아 및 그들의 자식들이었다면, 이번 편의 풍자대상은 오히려 국가와 언론 권력과 20대를 착취하는 기성세대다. 퇴행이 아니냐고? 그렇긴 하지만, 이 역시 영화의 퇴행이 아니라 현실의 퇴행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주유소 2>가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영화가 풍자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재미없고 암담하기 때문이다. 웃음이 그나마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 있었던 시대도 못된 채, 웃음으로도 달랠 수 없는 공허감이 지배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과연 영화의 실패라 말할 것인가. 오히려 <주유소 2>는 지금의 현실을 보다 세밀하고 정밀하게 영화 안에 담고자 그 어떤 영화보다도 치열하게 노력한다.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 적자생존을 펼쳐야 하는 20대들을 향해 '88만원 세대'라고 협박하거나 '희망이 없다'며 무시하는 대신, 20대들의 현실을 애정으로 들여다보고 "너희 잘못이 아니야"라고 토닥인다. 이들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한편 이들의 현실을 만들어낸 '기성세대의 책임감'을 통렬하게 풍자하는 것이다. 이런 영화를 어찌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렸던 글 (2010. 2. 6)

ps 1. <주유소 1>을 만들었을 당시 김상진 감독에게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이 선행했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유소 2>에서는 분명히 보인다. 설사 그것이 어떤 학적인, 일관된 구조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그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주유소 2>에서는 그가 지금의 20대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매우 강력한 일관성 하에 매우 윤리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 어쩌면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실패의 원인일 거라고도 짐작한다. 그러나 영화에 분명하게 일관성을 이루며 드러나고 있는 감독의 이 시선을 읽어주는 게, 영화글 쓰는 이의 나름의 예의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ps 2.  물론 동의하지 못하거나, "해석에 영화를 뜯어맞췄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이런 비난을 굳이 부정하거나 수용하지 못할 바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유소 2>에 대한 반응을 보려고 검색하다가, 듀나 게시판에 누군가 이 글을 링크해놓고 반응을 묻자 또 다른 누군가가 댓글에 "맙소사, 기자가 너무 이빨을 깠어요"라고 써놓은 것을 보니 이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더라. 차라리 내 글이 후지다거나 글을 못 썼다고 비난했다면 이렇게 거슬리지는 않았을텐데, 이런 멘트는 '글쓰기의 윤리'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으로 느껴져 모욕감까지 느껴지더란. 내게는 "너 글 좆같애"보단 저런 게 더 '저질 악플'로 느껴진다. 이빨을 까다니, 사람을 무슨 홍보 알바로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ps 3. 그래도 조한선은 영화에서 안성기와 투톱을 해본 적도 있는 배우인데, TV에서 주로 활동했던 지현우가 비중이 더 큰 캐릭터를 맡았다는 게 살짝 의외였다. 그리고 비록 연기 테크닉은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지현우에게 쇼맨십이나 스타로서의 아우라가 보이는 것도 조금 놀라웠고. 지현우가 그리 뛰어난 가창력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뮤지컬 <그리스>의 대니 역으로 데뷔하게 된 것도 워낙 오디션 장에서부터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스타로서의 자질'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이 영화를 보니 그 에피소드가 대충 수긍이 가더라. (난 한번도 지현우한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골드미스 다이어리>에서도 별 깊은 인상은 못 받았었는데. 음.)

2010/08/19 05:59 2010/08/19 05:59

Sherlock Holmes

역사상 가장 '팬시'한 홈즈가 아닐까 싶다.

가이 리치 감독이 돌아왔다.

데뷔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를 내놓을 당시 '새로운 천재의 등장'이라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스내치>만 해도 호평을 받았지만, 당시 부인이었던 마돈나를 주연으로 만든 <스웹트 어웨이> 이후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팽겨쳤던 그다. 심지어 <스웹트 어웨이>는 한 해 최악의 영화에 상을 안기는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감독상을 받을 정도로 조롱을 당했다. 이후 비교적 저예산으로 <리볼버>, <록큰롤라>와 같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한번 돌아선 관객과 평단의 마음을 되돌리기란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이 영화들은 국내에는 수입조차 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셜록 홈즈>를 만든다면서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주먹질에 육탄전을 즐기는 '액션 영웅'으로서의 셜록을 그린다고 했을 때, 기대보다 우려가 컸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반짝하고 등장했으나 금방 시들어버린 감독이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 거기에 마구잡이 헐리웃식 액션영웅으로 변모할 것 같은 셜록 홈즈. 그럼에도 기대를 버리지 못한 것은, 역시나 그가 <록 스탁...>과 <스내치>를 내놓았던 감독이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셜록을 연기할 거란 점 때문이었다. 뻔한 슈퍼히어로 영웅의 운명을 지녔던 <아이언맨>에 독특한 뉘앙스를 덧입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면, 셜록 홈즈를 그저 빤한 액션영웅으로 그리진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분명 있었다. 거기에 그저 홈즈의 조수가 아닌 동등한 협력자로서의 왓슨 캐릭터를 주드 로가 출연하며, 그 콧대높은 남성우월주의자 셜록 홈즈가 유일하게 무릎을 꿇은 여성 아이린 애들러가 적지 않은 비중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 역시 기대감을 높이는 데에 일조했다.

마침내 베일을 벗은 <셜록 홈즈>는 '절반의 성공'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충분히 즐겁고 매력적이지만, 가이 리치에 건 일말의 기대는 결국 배반을 당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Sherlock Holmes

근육과 주먹질 자랑에 여념이 없으신 RDJ 버전의 홈즈. 낯설지만 익숙하다...

가이 리치가 야심차게 내놓은 이 영화는 기존에 우리가 머리에 그리고 있던 셜록 홈즈와는 사뭇 다른 성격의 셜록 홈즈를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새로운 셜록 홈즈의 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작에서 제시됐던 요소들을 재해석하고 복원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훌륭하게 그려낸 새로운 셜록 홈즈는 우리가 익히 하는 그 사냥캡에 체크무늬 상의를 절대로 입지 않는다. 파이프 담배를 물기는 하지만 삽화 속 셜록 홈즈의 그것보다 단순한 직선형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상대의 급소를 어떻게 내리쳐야 그가 제압될지 잘 아는 무술의 달인이다. 특히 상대의 급소를 연달아 가격하는 장면에서의 고속 촬영 카메라 촬영은 홈즈의 정확한 계산과 판단을 그대로 드러내는 한편, 타격에 반응하는 신체의 움직임을 세세히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며 쾌감을 선사한다. '너무 빠른' 액션에서 오히려 시각적 쾌감을 놓칠 수 있는 점을 배려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셜록 홈즈>가 묘사하는 홈즈의 일상적인 생활과 취미는 원작에서 제공한 것을 크게 거스르는 것이 없다. 일이 없을 때의 홈즈가 대단히 게으르다는 사실은 이미 원작에서 제시된 것이고, 잘난 척의 거만한 독설은 사실은 사회성과 사교성이 부족한 성격을 가리는 방어기제일지 모른다는 것 역시 셜록의 팬들이 어느 정도 짐작했던 사실이다. 나아가 원작에서의 홈즈 역시 수준급의 권투실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던 만큼, 영화가 제시하는 액티브한 성격의 홈즈 역시 충분히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하다. 한마디로 원작의 정수를 크게 훼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Sherlock Holmes

가이 리치의 새로운 <셜록 홈즈>는 원작에서 분명 제시됐으나 그간 무시돼온 '액티브한' 셜록 홈즈를 그려낸다. 어찌 보면 이는 원래의 셜록 홈즈를 재해석하고 복원한 것에 가깝다.

주드 로가 그려낸 왓슨 역시 기존의 홈즈 영화에서와는 달리 홈즈 못지않은 무게감과 존재감을 갖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실 왓슨은 그간 홈즈의 믿음직한 파트너라기보다 홈즈의 천재성을 돋보이게 해주기 위해 어수룩하고 때로는 맹하기까지 한 인물로 격하되는 경향이 종종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왓슨은 원작에서도 군인 출신으로 반듯하고 정돈된 생활을 하며, 발이 묶인 홈즈 대신 활약을 하기도 하는 등 홈즈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존재다. 영화는 특히나 결혼을 앞둔 왓슨에 대해 불평을 하는 홈즈의 에피소드를 충실히 살려낸다. 홈즈는 영화 내내 왓슨의 결혼을 못마땅해 하며 훼방을 놓지 못해 안달한다. 홈즈 팬들 사이에서 기정사실화 되다시피 한 홈즈와 왓슨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의심을 영화 내내 살려놓고 있는 것. 여기서 발생하는 두 사람의 투닥거림이 영화에 큰 활력을 주는 코미디로 작용한다.

액션 어드벤처 영화로서 <셜록 홈즈>는 분명 아주 새롭지는 않아도 적지 않은 즐거움과 쾌감을 제공하는 영화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홈즈와 주드 로의 왓슨 콤비는 분명 '올해 최고의 커플' 순위에 올릴 만하며, 은비학과 마법의 트릭 때문에 길을 잃을 뻔한 셜록이 결국 과학적 논리와 추리로 사건을 풀어나가며 활약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다. 풍성한 드레스와 남성용 정장을 오가며 기계에도 능하고, 그 대단한 홈즈마저도 어린아이처럼 갖고 노는 아이린 애들러도 영화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홈즈의 숙적인 모리아티 교수가 짧게 등장하며 속편을 예고하는 것 역시 기대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속편에서는 홈즈의 형인 마이크로프트 경도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품게 될 정도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록스탁...>과 <스내치>에서 보여줬던 가이 리치의 독특한 매력이 <셜록 홈즈>에선 별로 보이지 않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순해졌고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며 스토리 역시 단선적이다. 전세계 만인이 즐길 수 있는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변화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배트맨> 프렌차이즈 안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자신의 족적을 선명히 새겨놨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가이 리치가 <셜록 홈즈>를 통해 증명한 것은 결국 그가 대형 상업영화를 매끈하게 잘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의 의미는 자명하다. 가이 리치 감독의 앞으로의 경력은 별 막힘없이 순탄하게 풀릴 것이며 앞으로도 여러 편의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초기작들을 사랑했던 관객들은 결국 '블록버스터를 무난하게 만드는 평범한 감독'을 얻는 대신 걸출하고 독창적인 영화 악동을 영영 잃어버린 셈이 됐다. 결국 가이 리치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아니었던 셈이다.




+ 프레시안무비(새 창으로 열기)에 기사로 올렸던 글. (2009. 12. 23)

ps 1. 개봉 직후부터 당연히 모라이어티 교수가 등장하는 속편 얘기로 분분했는데, 영화 나온 직후만 해도 브래드 피트가 관심있다는 소문이더니 요즘은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대세인 듯. 몇몇 해외 매체에서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캐스팅 확정됐다고 보도도 나왔으나, 8월 2일자 다른 뉴스에서는 대니얼의 매니저가 사실이 아니라며 부인했다는 설도 있다. (IMDB의 관련페이지(새 창으로 열기)를 참조하시라.) 브래드 피트의 모라이어티라니 좀 뜨악스러웠는데, 정말 대니얼 데이 루이스라면 좋겠다. 문제는 대니얼 님이 해주시느냐 마느냐...  어쨌든 <셜록 홈즈 2>는 이미 내년 12월로 개봉일도 정해진 모양이다. 촬영은 올해 가을부터 들어간다고. 감독은 여전히 가이 리치.

ps2. 근데 사회성 제로 잘난척쟁이 홈즈도 꼼짝 못하는 막강 카리스마 미중년 마이크로프트 경이 속편에 등장해주시길 바라는 건 저 뿐인가요.

ps3. 영화를 처음 보고 이 글을 썼던 당시를 회상해보니, RDJ가 셜록 홈즈로 딱이었다기보다는(그게 기존 이미지와 다른 셜록이라 하더라도), '고전적인' 영국풍의 액션활극의 주인공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이다.  말하자면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가 19세기 런던에서 탐정질로 놀고먹었던 '전생' 버전을 즐기는 기분이었던. 블록버스터의 당의정으로 어느 정도 중화된 느낌은 있지만 역시 <셜록 홈즈>는 괴작이었다는 결론. 상당히 즐거운 괴작.

2010/08/05 15:51 2010/08/05 15:51

나는 행복합니다

포스터는 많이 사기라능.

부스스한 머리를 고무줄로 묶는 한 여자의 뒷모습. 발을 겨우 끌듯 걷는 그녀의 걸음은 느리고 위태롭다. 약간 비틀대듯 걸어가던 그녀의 앞모습을 카메라가 비추자, 무릎까지 내려올 듯 무거운 눈가의 다크서클과 터진 입술이 눈에 띈다.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얼굴과 몸 전체를 가득 짓누르고 있는 피로감과 무기력감만 봐도, 그녀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정신병원의 간호사인 그녀, 수경(이보영)이 새로이 맞게 된 환자는 부스스한 머리와 역시 터진 입술을 한 조만수(현빈)이다. 가족친지가 아무도 없어 마을 이장의 손에 이끌려온 그는 의사와의 첫 면담에서, 종이를 꺼내 볼펜으로 '자기가 발행한' 수표를 써주며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도박빚에 미친 형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다 정신이 나가버렸다는 환자다. 영화는 이때부터 병원에서 생활하는 만수의 사연과 정신과 수간호사인 수경의 사연을 교차한다. 만수의 사연은 명백히 입원하기 전 있었던 '과거'의 일이지만, 수경의 사연은 현재진행형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너무나 큰 고통을 받았거나 받고 있으며, 그 사연이란 특정한 개인에게만 일어나거나 혹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흔한 보는 희귀하고 특별한 사연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익히 듣고 보았음직한 흔하고 일상적인 사연이라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자식도 못 알아보고 어쩌다 집밖을 나가면 길을 헤매기 일쑤다. 정비소를 함께 운영하던 건실한 형은 도박에 미친 후 돈을 내놓으라며, 그리고 이제는 정비소 계약문서를 내놓으라며 만수를 괴롭힌다. 심지어 한밤중에 만수의 목을 조르기까지 한다. 서울에 올라간 뒤 연락이 끊긴 연인은 어느 날 그를 찾아와 새 사람을 만났다며 이별을 고한다. 수경의 사연도 다를 바 없다. 암 말기인 홀아버지 때문에 재산을 모두 날린 그녀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면 아버지의 병실에서 간병을 하며 만성적인 피로와 불면증에 시달린다. 몰래 데이트하던 같은 병동 의사는 그녀를 멀리하고 새 연애를 하면서 그녀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나날이 쌓여만 가는 빚독촉 고지서와 전화 역시 잠시도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흔하고도 익숙한 사건들과 고통들.

그와 그녀가 착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은 배가 된다. 만수는 목을 조르는 형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노래방에서조차 큰소리를 내지 못한 채 겨우 뒷모습만 보이며 어깨만 가늘게 들썩인다. 수경은 한번쯤 도달할 곳 없는 원망 한 번 입밖에 내놓을 법한데도, 마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가 마지막 희망이기라도 한 듯 아버지의 병간호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세상은 착한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하고, 착한 사람들은 같은 불행이라도 착하지 못한 우리들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는다. 만수가 병원에 와서야 (가짜라고는 해도) 비로소 행복을 찾았듯, 어쩌면 지금 만수의 저 미쳐버린 모습은 수경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합니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형에게 반항 한 번 않은 채, 노래방에서 혼자 노래하며 슬픔을 달래던 만수. 현빈의 도약.

시간차를 두고 고통을 겪었던/겪고 있는 두 남녀는 비록 환자와 간호사의 관계지만, 서로의 고통을 '인지'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지적 관계다. 과대망상 속에서 행복을 찾은 만수는 고통에 대한 위로를 다른 환자가 아닌 '간호사'인 수경에게 건넴으로써 수경을 환자의 커뮤니티 안으로 끌어들인다. 수경은 특별히 간호사와 환자의 관계를 파기하지는 않지만, 다른 환자한테와는 다소 다른 톤으로 만수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그들은 환자와 간호사 이상의 관계로 다가서진 않으며, 특별히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희미한 연대의 순간, 혹은 찰나의 고통의 접점. 그 드물고 귀한 순간, 그들은 상대에게 '당신의 고통을 감지했다'는 희미한 싸인만을 보낼 뿐이다. 서로에게 어깨를 빌려주기엔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자신의 짐의 무게가 너무나도 크다. 그 희미한 순간이 과연 그들에겐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지독한 고통 속에서 과연 '행복'의 순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이 영화가 진정으로 다루는 것은 '고통'이다. 주인공들의 지독한 불행과 고통은, 현실의 갑남을녀가 겪는 일반적인 불행들과 너무 닮아있다. 그런 현실을 직접 겪거나 간접적으로 주변에서 노상 보고듣는 관객들의 입장에선 선뜻 이들의 불행과 행복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들어서기가 힘들다. 실제로는 매우 화사한 외모를 갖고 있는 두 배우가 단순히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추레한 옷차림을 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으며 어디에도 구원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영화의 엔딩에서도 예정된 것이다.

이청준의 원작소설이 끔찍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 것과 달리, 영화는 그 에피소드를 생략한 채 '완치되어 퇴원한' 만수가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달리는 장면으로 끝을 낸다. 오토바이에 달린 희미한 헤드라이트가 간신히 비추는 어두컴컴한 밤길,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다. 수경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수경은 비로소 병원(그가 근무하는 곳과 간병을 하던 곳, 둘 다)을 벗어나 혼자만의 여행을 간다. 그러나 그렇게 절박하게 수경을 땅 위로, 맨정신으로 붙잡아매던 아버지가 죽은 뒤 홀로남은 그 삶을, 과연 그녀는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영화의 보도자료는 그 엔딩이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끝도 없이 이어진, 오토바이의 가느다란 헤드라이트만 켜진 그 어둡고 긴 길을 보며 희망을 느낄 관객들이 얼마나 있을까. 수경과 만수에게 놓인 앞으로의 삶의 시간을 예고하는 그 길엔 여분의 빛도 동반자도 없다. 원작의 드라마틱한 엔딩이 거세된 채 남은 영화의 엔딩은, 오히려 너무 끔찍하게 현실을 닮아있다. 너무 끔찍해서 도저히 불행하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는, 차라리 지독한 역설로서의 행복을 말하며 그 불행을 눈앞에 정면으로 들이미는 이 영화, 참으로 지독하다.

나는 행복합니다

모습 전체에 '지치고 피곤한 삶'이라고 대놓고 써 있었던 이보영의 모습이 참 인상깊었었는데.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실었던 글. (2009. 12. 7)

ps. 우울한 내용 때문에 흥행이 안 되는 건 이미 예상됐던 것이지만, '너무 조용히' 지나가서 참으로 의아했던.

2010/08/04 18:53 2010/08/04 18:53

Moon

원제는 그냥 '문'이다

황홀하고 화려한 CG와 극적인 액션, 긴박한 스릴의 상황이 동원되는 SF(혹은 SF를 표방한 액션 활극)가 워낙 많이 나오고기 때문에, <더 문>은 일견 지루하고 초라한 SF로 보일 수 있다. 허허벌판 달 표면 위에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기지의 외관과 실내의 풍경은 물론이고, 주연배우도 달랑 샘 록웰과 케빈 스페이시 두 명이다. 게다가 케빈 스페이시는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그는 인공지능 컴퓨터 '거티'의 목소리를 맡았다.) 샘 록웰의 아내나 딸, 혹은 이 우주기지를 건설한 글로벌 기업의 중역은 거의 단역으로나 등장하는 정도다. 이 정도 되면 거의 배우 한 명의 '모노드라마'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더 문>은 역으로, 돈을 별로 들이지 않아도 훌륭한 연기와 연출만으로도 흥미진진한 SF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영화다. 신인감독인 던컨 존스가 이 영화에 들인 제작비는 총 5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50억 남짓하는 돈이다. 그러나 샘 록웰의 황홀한 1인 2역 연기에 영화 자체가 던지는 묵직한 주제의식이 더해지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수작'이 됐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샘 벨(샘 록웰)은 달에 우주기지를 세운 한-미 합작 글로벌 회사에 3년 계약을 맺고 달 기지에서 외로이 근무하고 있는 남자다. 그의 임무는 달 표면에 쌓여있는 헬륨3를 지구에 정기적으로 송출하는 것. 전세계가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경험한 뒤 달 표면의 헬륨3를 무공해 청정원료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정된 근미래가 배경이다. 그리고 영화의 공간은 철저하게 달 표면 위에 세워진 '사랑' 기지에 한정되며, 그나마도 기지 안 세트가 주요 공간이다. 지구와 실시간 통신은 끊어진지 오래고, 샘은 목성을 통해 전송된 영상 메시지만으로 지구 위의 가족과 연락을 취할 수 있을 뿐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정해진 일을 하며, 남는 시간을 모형 조립과 흘러간 옛 TV쇼를 보는 걸로 떼우는 매우 외롭고 단조로운 일과다.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은 그가 계약만료 2주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지구로의 귀환을 고대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내던 그는 이상한 환각을 보기 시작하고, 원료 채취 임무에 나섰다가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어떻게 구조됐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이 기지 안 의료실에서 깨어난다. 영화의 진짜 미스테리와 사건은 이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 이후부터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Moon

경이로운 샘 록웰.

<더 문>은 SF장르에서는 매우 익숙한 설정인 '복제인간'을 소재로 한다. 기지 안 금지된 구역 안에는 똑같은 외모로 잠들어있는 무수한 샘 벨이 즐비하고, 3년의 시한부 목숨을 가진 이 복제인간들은 자신이 클론임을 모른 채 그저 조작, 주입된 기억만을 가지고 '계약 초기 사고로' 깨어났다가 3년을 채운 뒤 죽는다. 기한이 만료되거나 극한 부상을 당한 클론은 폐기되며, 살아 생전,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클론임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진짜 사건은, 절대로 서로의 존재를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두 클론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셈이다. 하지만 익숙한 설정과 장르문법을 사용하면서도, <더 문>은 매우 새롭고 참신하며 흥미롭다.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 아니 의심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가 실은 클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격일 터이다. 영화는 '이전의 샘'이 '새로운 샘'을 만난 뒤 비밀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혼란과 충격뿐 아니라, 그로 인한 정서적 파장과 고통을 매우 절절하게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복제인간 설정의 영화가 일반적인 '도플갱어 공식'(자신의 도플갱어를 본 이는 반드시 죽는다, 혹은 한쪽이 다른 쪽을 죽이려 든다)을 따르는 것과는 달리, 두 클론이 서로 유대감을 느끼며 서로 협조하고, 궁극에는 다른 이를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들이 특별히 착하고 희생적이어서라기보다는, 극도의 고립감과 고독, 혹은 서로에 대한 동질감과 연민이 충격과 혼란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서로 성격이 다른 두 샘(이전의 샘은 보다 온화한 성격에 다소 무기력한 면이 보이는 반면, 새로운 샘은 좀더 다혈질에 에너제틱하고 급한 성격이다)은 서로 몸싸움을 벌일 정도로 격한 대결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들을 착취한 거대기업의 음모에 맞서는 한편 예정된 운명을 거스르고 지구로의 귀환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영화는 흔하디 흔한 '클론 설정'의 영화가 손쉽게 드러내는 주제인 '정체성'을 보다 심도있게 다루는 동시에, 이 한계를 넘어 도약한다. 한국의 관객 입장에서는 클론들의 운명을 보며 1회용으로 소모되고 버려지는 일반적인 비정규직의 현실을 겹쳐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감독이 이를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애초에 7, 80년대에 나온 무수한 '낡은 SF영화들' 스타일의 SF영화를 기획하면서 주인공으로 '일하는 노동자'를 설정한 것은 이러한 해석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Moon

첫 샘과 두 번째 샘을 연기할 때의 샘 록웰은 확연히 다르다. 외모뿐 아니라 성격, 말투, 표정까지도. 위대한 샘 록웰.

두 명의 샘 벨(정확히 하자면 세 명)을 연기해 내는 샘 록웰의 연기는 한마디로 '환상적'이다. 두 클론의 서로 다른 성격을 묘사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비밀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나 고독, 단조로운 일과에서의 무기력감 등 복합적인 감정들을 절절히 표현해낸다. 굳이 SF의 팬이 아니어도, 샘 록웰의 연기만으로도 황홀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사실 이 영화는 애초에 샘 록웰의 팬이었던 감독이 자신의 차기작 <뮤트>(리들리 스콧이 제작을 맡았다)의 캐스팅 과정에서 샘 록웰과 의견차가 생기자 '오로지 샘 록웰과 작업하기 위해' 쓴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사실 샘 록웰은 국내에 '스타급 배우'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연기에 반한 조지 클루니가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웰컴 투 콜린우드>를 위해 조연을 자처하고 제작까지 맡은 건 이제 유명한 일화가 됐다. 이후 조지 클루니는 자신의 연출 데뷔작 <컨페션>에서 샘 록웰을 주연으로 기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샘 록웰의 연기에만 전적으로 기대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다소 소박한 스토리라인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서 스릴을 만들며 긴장과 공포, 충격을 만들어내는 솜씨와, 샘 록웰의 연기를 적절하게 조율하고 대립시키는 던컨 존스의 연출 솜씨는 신인감독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고 솜씨있다. 리들리 스콧이 자신의 후계자로 던컨 존스를 지목한 것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던컨 존스가 위대한 뮤지션 데이빗 보위의 하나뿐인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기지 이름이 '사랑'(한글로도 또렷이 표기된다)인 것은, 감독이 워낙 한국에 관심이 많은 데에다 시나리오를 쓸 당시 박찬욱의 <올드보이>를 보며 오마주를 바치고 싶어했기 때문. 감독이 굳이 한국 개봉에 맞춰 내한해 기자간담회 등을 진행한 것도 이같은 한국에 대한 관심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실린 글 (2009. 11. 16)

ps1. 이 훌륭한 영화가 작년과 올해 초 미국의 각종 시상식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시상식 시즌이 되면 각 배급사들은 자신들의 영화 중 후보가 될 만한 영화들을 뽑아 DVD 패키지를 만들어 심사위원들에게 뿌리며 캠페인을 벌이는데, 던컨 존스 감독이 자신의 트위터(@ManMadeMoon)에서 밝혀 나중에 헐리우드리포터 등에 기사화된 바에 따르면, 미국 배급사인 소니 측에서 "이런 저예산영화는 패키지에 찍을 워터마크 비용이 더 든다"면서 <더 문>을 빼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언맨>의 감독 존 파브로는 이 사실을 알고 소니에 굉장히 화를 내었으며, <스타더스트> <베오울프> 등의 작가 닐 게이먼은 던컨 존스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어쨌든 이 영화는 던컨 존스의 고향인 영국에서는 BAFTA (영국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ps2. 한편 던컨 존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위대한 연기를 보여준 샘 록웰 만큼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야 한다"며 자신의 블로그에서 "샘 록웰을 아카데미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올해 <크레이지 하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제프 브리지스는 충분히 상을 받을 만한 연기를 펼쳐보였을 것이다. (미안, 영화를 못 봤다.) 그러나 샘 록웰이야말로, 작년 모든 영화들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위대한 남자배우였다. 물론 그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훌륭한 연기를 보여줄 것이다.

ps3. 그러므로 결론은, 샘 록웰 만세!

2010/08/03 00:34 2010/08/03 00:34

백야행

한석규, 손예진, 고수 주연의 영화 <백야행>이 10일 오후 2시 언론, 배급시사를 갖고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백야행>은 국내에도 탄탄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원작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신인감독 박신우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다.

영화 <백야행>은 유미호(손예진)의 섹스씬과 김요한(고수)의 살인씬이 교차되면서 시작한다. 피해자는 14년 전 벌어진 살인사건에서 용의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다. 그리고 유미호와 김요한은 각각 14년 전 살인사건의 용의자의 딸과 피살자의 아들이다. 영화는 이들 둘 각자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이들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듯 만 듯한 관계를 파고들어간다.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유미호의 뒷조사를 하던 약혼자의 비서실장 이시영(이민정)과 14년 전 사건의 담당형사였던 한동수(한석규)의 눈을 통해서다. 과연 14년 전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 14년간, 이들은 대체 어떤 관계를 맺어온 것일까?

연쇄살인, 피해자와 가해자 유족의 한 공간에서의 공존, 그리고 근친살해와 유아강간까지. 영화는 온통 자극적인 설정과 사건으로 넘쳐난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유미호와 김요한의 사연과 비밀은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이으면서 조금씩, 천천히 밝혀진다. 그리고 마침내 14년 전의 비밀이 밝혀졌을 때, 관객의 입장에선 이들을 쉽게 단죄하기도, 그렇다고 동정하기도 어려운 심적 갈등에 놓인 채 그들에게 압도되고 만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마도 이것이 원작이 가졌던 가장 큰 매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가져온 14년간의 관계야말로 이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했을 때 기획자들의 주목을 가장 끌었던 요소였을 것이다.

총 세 권 및 20여 년에 달하는 원작의 시간과 분량의 무게 때문인지, 안타깝게도 영화는 조금 줄이거나 쳐냈으면 좋았을 곁가지들이 많아 산만한 편이다. 다소 아귀가 안 맞더라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묵직한 힘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영화는 소소한 부분까지 아귀를 챙기면서도 정작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일관된 힘이 없이 사건을 계속 나열하는 식이다. 각 캐릭터와 이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 역시 거대한 미스테리가 한 조각 한 조각 맞춰져 간다는 쾌감을 주기보다 끝까지 이질적으로 따로 논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다. 한석규나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한 차화연, 정인기, 임지규 같은 좋은 배우들이 나오는데도 그렇다.

사실 이 영화 자체가 거대한 미스테리이기도 하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점들로 가득차 있는 까닭이다. 단역에 불과한 형사들 하나하나를 굳이 클로즈업으로 잡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관객을 억지로 밀착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한동수의 사연은 어떠한가. 과연 어느 누가 그런 현장에 자기 아들을 데려가 그런 부탁을 한단 말인가. 민경호나 호스트바의 '약통' 캐릭터가 굳이 화면에 나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백야행

무엇보다도 영화를 만든 이들이 유미호와 김요한을 너무 연민하고 동정한 까닭에, 이들의 잔인무도한 악행이나 괴물성은 '절절한 사랑이야기' 뒤로 너무 쉽게 면죄부를 부여받는다. 원작에서는 전후 일본의 재건과 자본주의화에 있어 암흑의 역사를 통렬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라던 두 사람은 영화 버전에서는 어찌 그리 '가여운 피해자'로만 그려지며 모든 책임이 당연히 부모 세대에만 돌려지는지 모르겠다. 필요없는 '어린 피해자'를 만든 건 분명 유미호인데,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그를 '외면'을 하는 것이 마치 그 피해자를 지키기 위한 결단인 양 화면을 처리한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왜 인물들에게 변명을 자꾸 보태주는 것일까. 그냥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인물들로 그려졌어도 비극은 충분하지 않은가. 혹은 한 인간에 저질러진 죄악에 대한 '대속'의 과정이 더 큰 악행이 되는 그 아이러니만 잘 표현해냈어도 반은 성공하지 않았을까.

영화 속 모든 주요 캐릭터들과 감독이 이들 남녀를 너무 잘 이해하고 보듬어 안고 알아서 변명까지 해주는데 굳이 관객까지 그래야 할까 싶다. 온갖 악행들이 저질러지지만 아무도 속죄하는 이는 없다. 그나마 한 사람을 향한 속죄는 더 많은 사람들을 향한 악행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연민은 넘쳐난다. 원작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했던, 관객의 어깨에 응당 지워줬어야 할 '선/악의 무게'의 균형점을 잃었거나, 이들의 악화일로의 선택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채 '변명'만 늘어놨거나. 이야기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차라리 일찌감치 니들끼리 도망가 살지 그랬니." 같은 반응이 더 당연해 보인다. 아니, 어쩌면 이런 식의 책임전가와 자기연민이야말로 지금 한국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정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그것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인 건지도 모른다.


+ 프레시안에 올라갔던 기사(새 창으로 열기) (2009. 11. 10)

ps1. <백야행>이 언론시사를 한 뒤, 리뷰기사로는 아마 프레시안의 이 글이 처음이었던듯. 그래서인지 별로 좋지 않은 평에 당장 영화홍보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받지 않아서 다행, 만약 내가 받았다면 영화사와 싸웠을지도.

ps2. 손예진은 <작업의 정석>에 나왔을 때가 가장 잘 어울렸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난 이 아가씨가 진지한 척, 비밀이 있는 척, 혹은 카리스마 있는 척 무게잡는 걸 보면 적응이 좀 안 된다. 배우에 대한 선호도의 문제가 아니라, 손예진은 살짝 얄팍하고 가벼운 역을 라이트하고 사랑스럽게 - 애교를 섞어 -  연기하는 게 가장 잘 어울리는데, 의외로 글래머 몸매인 것 때문에 종종 '섹시한 척'하는 역을 맡는다. 보는 나는 심하게 민망한 게 사실인데, 남자관객들은 의견이 좀 다른 것도 같고...

ps3.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씬은, 한석규와 차화연이 그 낡은 차화연의 바에 앉아 대화하던 씬. 그저 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포스가 넘쳤는데, 고수-손예진이 차지하는 다소 가벼운 느낌의 씬(뭘해도 어쩐지 가볍게 느껴지더란)과 엮이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들어 안타까웠던 기억.

2010/08/02 12:58 2010/08/02 12:58

올 겨울 대작들의 치열한 흥행접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가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첫 선을 보였다. <아바타>의 배급사인 20세기폭스는 11일 낮 2시 영등포CGV에서 언론시사를 갖고 전세계적인 관심과 기대를 불러모으고 있는 <아바타>를 드디어 국내에 공개했다. <아바타>는 <터미네이터> 1, 2와 <에일리언 2>, <트루 라이즈>의 흥행작들은 물론, 전세계 흥행 1위작인 <타이타닉>을 연출한 제임스 카메론이 12년만에 선을 보이는 영화라는 점에서 전세계 영화팬들의 기대를 모아왔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만을 위해 신기술을 전격 개발, 도입하여 구현한 영화의 장면 중 20분 가량의 동영상을 일찌감치 공개하면서 전세계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Avatar

드디어 베일을 벗은 <아바타>는 과연 모든 점에서 관객들을 놀래키며 새로운 레벨의 시각적 쾌감과 충격을 안겨줄 만하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자랑했던 이모션 캡처 및 가상 카메라의 위력은 놀라움을 넘어서 경이로운 수준이며, 전반적인 CG 기술 역시 놀랍다. (가상의) 판도라 행성을 수놓고 있는 자연과 기기괴괴한 생명체들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파란 피부에 긴 꼬리와 날카로운 귀를 가진 3미터 장신의 나비 종족 및 이들과 인간의 DNA로 만든 생명체인 아바타(그와 DNA가 맞는 인간이 의식으로 조종한다)의 동작과 표정도 매우 자연스럽게 구현됐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반(샘 워딩턴)의 아바타가 나비종족의 네이티리(조이 살다나)와 함께 거대한 새 이크란을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 숲에서 거대한 생명체에 쫓기는 장면 등도 박진감이 넘치거니와, <에일리언 2>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장면들을 뛰어넘는 전투씬들도 관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다. 2시간 42분의 다소 긴 러닝타임이지만 단 한 순간도 지루해할 틈이 없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벌이는 대규모 전투씬은 그 어떤 이전의 전쟁영화보다도 화려하고 큰 스케일을 자랑한다. 거기에 <타이타닉>에서 다소 실소를 자아냈던 로맨스도 이 영화에서는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러우며 설득력있다. 액션과 모험, 로맨스,그리고 전쟁영화 등 모든 장르가 한 영화 안에 들어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만족스럽다. 한마디로 <아바타>는 속이 꽉 찬 종합선물세트다.

그러나 <아바타>의 놀라움이 단순히 새로운 테크널러지나 화려한 볼거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바타>는 단순히 낯선 행성에서의 모험과 상투적인 두 문명의 충돌 및 전쟁만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인류가 '문명화, 근대화'의 이름으로 침략과 전쟁을 자행했던 이른바 '식민지 근대'의 역사를 혹독하게 비판하며 자연 속에서의 공존을 강조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판도라 행성 도처에 깔려있는 값비싼 언옵타늄이라는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판도라 행성에 기지를 설치하고 채굴을 하는 인간의 탐욕은 곧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남아메리카를 침략해 식민지화했던 근대 유럽의 식민전쟁을 연상시킨다.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어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며 살아가고,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며 죽은 동물들의 영혼을 존중하는 나바족들의 생활풍습은 우리가 흔히 '인디언'이라 불러왔던 아메리칸 네이티브들의 풍습과 닮았다. 쿼리치 대령의 지휘 하에 이들의 정착지가 무자비한 공중폭격을 당하는 장면은 곧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벌어졌던 네이티브 학살 및 착취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지옥의 묵시록>에서의 그 유명한 폭격 장면을 연상시키며 베트남 전의 이미지까지 끌어들인다. (이 장면에서 쿼리치 대령이 사용하는 작전 이름도 '발키리 1-6'이다.) 때문에 영화 중반, 나비 종족들의 거주지가 폭격당하는 장면은 그 엄청난 스케일과 스펙터클 때문에 더욱 참혹하고 경악스러운 학살과 파괴의 공포를 전달한다.

<타이타닉>에서도 제임스 카메론은 거대한 재난영화의 틀 안에 계급사회의 폭력과 휴머니즘을 담으려 시도한 바 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도 그는 일차적으로 눈을 유혹하는 뛰어난 시각효과와 놀라운 상상력 아래에 '기계조차도 배우게 되는' 휴머니즘을 심어놓았다. 하지만 전작들에서 카메론 감독이 시도했던 이러한 '메시지'들은 언제나 화려한 볼거리 앞에서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앙상하게 그 얕음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바타>는 공백의 12년 동안 카메론이 그저 영화의 테크놀로지만 고민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담아야 할 메시지와 철학을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바타>는 감히 '영상 혁명'을 자처하는 데에 토를 달고 싶지 않을 만큼 혁명적인 기술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카메론의 전작의 어떤 영화들도 도달하지 못했던 깊이있는 근대문명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수행한다.

<타이타닉>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제임스 카메론은 "나는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친 바 있다. <아바타>를 내놓은 뒤의 제임스 카메론은 "나는 영화의 신이다"라고 자처해도 그 누구도 감히 반박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될 듯하다. 아마도 <아바타>의 흥행 역시, 단순히 다른 영화들에 비해 얼마나 흥행할 것인가보다 이제 그 자신이 세운 <타이타닉>의 기록을 과연 깰 수 있을 것인가가 더욱 화제가 될 것이다.


ps1. 영화가 끝난 시간이 5시. 지하철 타고 사무실 오면서 지하철 안에서 쓴 기사(새 창으로 열기). 일단은 단평, 제대로 된 리뷰는 다시 쓸 예정. 어쩌면 두어 번 더 볼지도.

ps2.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 후반부의 전투씬들에 열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판도라 행성에서 제이크가 네이티리로부터 나비종족이 문화와 풍습을 익혀나가는 전반부가 훨씬 좋았다. 약육강식이 지배하고 있지만 '순리대로' 살아가며 균형을 지키는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나비족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후반부 전투씬은, 오히려 전투기가 불덩이가 돼서 떨어지며 나무들을 태울 때마다 보는 게 고통스럽더라. 내게는 '신나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씬'이 아니라 저 아름다운 곳이 다 망가지고 파괴되는 상실과 아픔의 전투씬이었다. 사실 그 전, 발키리 1.6 장면에서 아미 나비족의 거주지가 다 파괴돼버리는 바람에... 그 공중폭격씬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는.

ps3. 사실 한번도 제임스 카메론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여전히 리들리 스콧의 1편을 더 좋아하며, <터미네이터> 시리즈도 그렇게까지 열광하며 좋아하진 않았고, <타이타닉>은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바타>를 보고나서 든 생각은, "야 그냥 너 짱먹어라" 뭐 이런 느낌. 그리고 헐리웃에서 로버트 저멕키스와 함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기술오타쿠인 그의 그 집념의 장인정신은 인정해줄 만하다는 거.

2009/12/12 10:52 2009/12/12 10:52

어제(9일)자 보도메일로 받은 <아이언맨 2>의 티저 포스터입니다.

Iron Man 2

아아 저 보석같은 눈! 그 분이 돌아오십니다.

이제 좀 안정됐나 하면 또 마약으로 잡혀 들어가고, 잡혀 들어가고 하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일명 RDJ)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더니만 이렇게 즐거운 눈요기거리를 계속 던져주고 계십니다. 전 이 사람의 출세작인 <채플린>(... 그 전에 출연했던 청춘물들은 잠시 제껴놉시다. 아직 '배우'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보여주진 못했으니까)은 아직까지도 못 봤지만, 안토니오니 감독의 <구름 저 편에>의 한 에피소드에서 이렌느 야곱과 나왔을 때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우연히 처음 본 여자한테 작업을 거는 거리의 소매치기인 그는 너무나 맑은 눈에 순정과 진심을 가득 담고 있으면서 쉬이 상처받을 연약함을 내비치곤 했습니다. 하지만 경력을 좀 쌓아나간다 싶으면 마약, 나와서 좀 정신차리고 다시 경력 쌓나 하면 또 마약, 해서 어느새 관심 밖으로 밀쳐놨었지요. 지금 다시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이런, 전 RDJ와 헤더 그레이엄을 보겠다고 <인 드림즈>나 <투 가이즈 앤 어 걸> 같은 영화도 찾아본 주제에 <숏컷>이나 <사랑의 동반자>, <내츄럴 본 킬러>, <원 나잇 스탠드>, <진저브레드맨> 출연 때의 모습은 기억이 안 나는군요. 그나마 인상깊었다면 <원더보이스> 때 정도. <회색도시>는 케이블서 방영할 때 녹화도 떠놓고는 안보고 테입도 잃어버린 듯해요. 그 안타까움이 극에 달했던 건 아마도 TV시리즈 <앨리 맥빌> 때였을 겁니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시리즈 자체가 불안불안해진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그 시리즈를 구원하는 듯했지만, 웬걸, 또 마약으로 들어가더군요. 이쯤되면 거의 포기하라는 거죠.

그런데 그는 기적적으로 기사회생합니다. 단편영화 주연이나 장편의 조연으로 조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고 <퍼>와 <조디악>, <찰리 바틀렛> 같은 영화에 출연을 하죠. 특히나 <찰리 바틀렛>에는 마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맥스처럼 어린애 주제에 어른처럼 굴려는 찰리 바틀렛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본인은 알콜중독으로 몸을 휘청대는 교장선생님 역을 하면서, 마약으로 휘청대던 젊은날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해 보여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불행했던 시절을 소재로 멋진 유머로 소화해내는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리고 <아이언맨>으로 '스타'의 자리를 찾습니다.

사실 <아이언맨>에서 RDJ의 모습을 제대로 처음 본 젊은 관객들에게야 RDJ가 '새로운 발견'으로 보였겠으나, 저같은 사람들에겐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기적의 한 장면'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나이가 들고 폭풍같은 시기를 지낸 그는 여전히 선하고 순수한 눈에 '그윽한 깊이'를 함께 담고 있었지요. 혹자들은 <아이언맨>이 역시나 팍스아메리카나를 외친다며 고까워했지만, 저는 아이언맨을 연기하던 RDJ의 연기톤이 매우 특수한 '냉소'와 '자조'를 띄고 있던 걸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젊은 날을 스스로 개그의 소재로 삼듯, <아이언맨>에서의 RDJ는 자신의 캐릭터를 스스로 놀려먹는 듯한 뉘앙스를 띄면서도 그 캐릭터를 더없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진부한 팍스아메리카나 히어로에 미묘하게 다른 옷을 입히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트로픽 썬더>에서의 연기는, 아... 정말 말이 필요없지요.

내년 4월, RDJ는 아이언맨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 전에, 올 겨울엔 다소 다혈질에 사고뭉치인 셜록 홈즈를 연기할 예정이고요. 주먹질을 일삼고 자기과시와 허영기가 있으며 실수를 연발하고 왓슨의 뒤수습에 의존하는 셜록 홈즈라니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지만, 그걸 RDJ가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아마 셜록 홈즈를 광적으로 사랑하는 다수의 셜로키안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겠지만, RDJ라면 그런 셜로키안들조차 잠잠하게 만들 멋진 셜록 홈즈를 보여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한때 게이설이 돌았을 정도로 동료 남자배우와의 케미스트리가 좋은 만큼, 주드 로와의 궁합도 기대되는 요소입니다. 어쩐지 너무 일찍 힘이 빠져버린 듯한 가이 리치는 조금 염려스럽지만, 이참에 과거 <록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 시절의 명성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므로 통과.

<아이언 맨 2>는 속편답게 규모나 물량도 커지겠지만, 스칼렛 요한슨이 등장해 귀네스 펠트로와 신경전을 벌인다니 그것도 무척 기대됩니다. 그나저나 미국개봉은 5월 7일이라면서 국내개봉은 4월이라니, 이거 가능한 얘기인가요? 전세계 혹은 한미 동시개봉은 봤어도 이런 대작을 국내에서 먼저 개봉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혹시 이거 얘기 들으신 분?

2009/12/10 15:16 2009/12/10 15:16

전우치

아이고 저 표정 봐라, 우째 저래 이쁘노.

... 무조건 예쁘게 나오면 흥행 성공한다.

... 라고 강동원을 예뻐하는 사람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는 그래도 컬트팬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반면<M>이 그러지 못한 것은 <M>의 강동원의 모습에서 대머리 기가 보였기 때문... 이라고들 하죠. 물론 정말로 그에게서 대머리 기가 보인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짧은 M자 머리가 보기에 살짝 부담스러웠던 거겠죠. 아직 꽃다운 '소년'(잘해봤자 '청년')을 '어른 남자'로 그리는 것에 대한 반발감이라 해야 할까. 이 면에 대해선 이명세 감독님이 조금 "성격이 급하셨다"는 게 저의 해석입니다. 몇 년만 참으셔도 됐을 것을, 얜 아직 군대도 안 갔다왔다고요. 군대 갔다오기 전에 되도록 샤방하고 예쁜 모습을 많이, 라는 게 누나팬들의 공통된 심정이랄까.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난 듯, 어쨌든 공익 가기 전 마지막 작품이 될 <전우치>에선 강동원이 아주 예쁘게 나올 듯하니 다행입니다만. 다음 주 월요일 언론시사를 보고 나면 알게 되겠지요.

강동원이 예뻐서 <늑대의 유혹>도 앉은 자리에서 DVD 코멘터리로 보는 것 포함 두 번 정주행하고 장면 발췌보기로 또 돌려본 저라고는 하지만, 최동훈 감독이 처음에 강동원 데리고 <전우치> 찍겠다고 그랬을 땐 아니 감독님하 뭐 잘못 드셨나요, 라는 게 솔직한 제 심정이었습니다. 모델에서 배우로 전업한 또래들 중에선 그래도 강동원이 의외로 연기자로서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그녀를 믿지 마세요>같은 영화에선 굉장히 잘 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대작의 주연으로서는 아직 검증 안 된 것도 사실이죠. 거기에, 사실 최동훈 감독의 이전 두 작품도 보면 매우 능숙한 배우들에게 기댄 면이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나, 모두 제자리에서 제 몫 알아서 똑소리나게 해먹는 배우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지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박신양도 그랬고, 조승우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백윤식 선생이나 김윤석, 이문식, 천호진, 주진모...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에선 너무 잘하시는 백윤식의 연기를 오히려 살짝 눌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오히려 살짝 삑사리가 났다고 생각할 정도인데.

설상가상, 촬영이 끝난지 한참 지나서도 좀처럼 개봉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기자들 사이에서 영화가 영 안 나왔단 소문이 파다하기 돌았습니다. 물론 CG를 잔뜩 사용하는 영화들은 원래 후반작업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긴 합니다만, 대체로 후반작업이 길어지고 개봉이 늦춰지면 늦춰질수록 '본 촬영분이 나빠서 배급사에서 개봉을 미루며 덧손질을 많이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십상입니다. 이건 많은 영화들의 케이스에서 일정부분 사실이라고 증명되기도 했었으니, 100억이 넘게 들어갔다는 <전우치>에 대해 무성한 뒷말이 많았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제가 기대를 갖게 된 건 지난 번 제작발표회에 다녀와서(새 창으로 열기)입니다. 맛뵈기 동영상 속에서 강동원의 전우치는 매우 이쁠 뿐 아니라 발랄하고 유쾌했고, 임수정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뻤으며, 염정아는 얄팍해서 웃기지만 밉지는 않은, 오히려 귀여운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김윤석의 카리스마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감독이나 배우들의 자신감도 꽤 있어보였습니다. 최동훈 감독의 자신감은 봉준호 감독과는 또 다른 면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게 사실이에요. 봉오빠가 등장할 때 제가 같이 들떴던 게 "드디어 한국에서도 '영화를 갖고 노는' 감독이 나타났다"는 거였는데, 최오빠 역시 그렇습니다. 상영된 메이킹 장면들에서, 물론 힘들고 고민하거나 심지어 험악한 때도 많았겠고 그건 모두 잘라냈겠습니다만, 그래도 영화 만들면서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표정이 많이 보였습니다.  다만 조금 걱정되는 건 CG인데요. 맛뵈기 동영상에선 얼마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얼핏 보이는 CG의 수준이 약간 조잡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본편에서 색보정과 기타 다른 보정을 거치면 달라지겠으나, 예고편에서 드러나는 밤의 추격씬 화질도 다소 조악했고요. 물론 그런 거 보정하는 것도 후반작업 중 일부이고 제작발표 할 때에도 한참 CG 작업중이라고 했었으니, 본편에선 보다 나은 화면을 볼 수 있겠지요.

기사를 쓰기 위해 찾아본 전우치와 서화담의 기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전우치가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정사실인 것 같군요. 생몰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당대 여러 기록에서 전우치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고, 장난기와 유머가 가득한 선행의 기록도 있지만 치기와 악동의 기록도 꽤 됩니다. 남 골려주고 소소하게 복수해주고 상사병 걸린 친구 돕겠다며 정절 지키고 있던 과부 보쌈하는 행태까지... 전우치가 "발라버리겠다"고 자신만만 찾아갔으나 오히려 된통 깨지고 스승으로 모셨다는 서화담이, 우리가 황진이와의 에피소드로 알고 있는 그 화담 서경덕 선생이 맞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지요. '리'는 개무시하고 철저한 주기론을 펼쳤다는 이 양반이 한편으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많았고 토정 이지함의 스승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신비술이나 동양적인 은비학, 도술에 관심이 컸다는 얘기가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랬던 양반이 영화 <전우치>에선 악당으로 나온다니 기분이 좀 묘하기도 하네요.

어쨌거나 <전우치>가, <타짜>때 쩍 벌렸던 제 입을 두 배로 더 쩍 벌리게 해주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최동훈 화이팅!

2009/12/10 14:25 2009/12/10 14:25

장편 데뷔작 <죽어도 좋아>에서부터 <너는 내 운명>과 <그놈 목소리>, 그리고 추석 시즌작으로 이번 주에 개봉하는 <내 사랑 내 곁에>까지, 박진표 감독은 이제껏 모두 다 징한 사랑 영화를 만들어왔다. 실제 유괴, 납치 사건을 다뤘던 <그놈 목소리>조차도 아이에 대한 절절한 부모의 사랑과 상실감을 중심에 놓는 영화다. 신작인 <내 사랑 내 곁에>에 대해 감독 스스로는 "이번에는 좀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하지만, 이 영화 역시 루게릭 병이라는 희귀 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장례지도사의 격정적인 사랑을 다룬다. 신파 멜로라고? 맞다. 하지만 박진표 감독의 영화가 신파 멜로가 아닌 적도 있었던가. 다만 우리가 흔히 비하적 뉘앙스를 덧붙여 말하는 그런 신파 멜로가 아닐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며 매번 눈물을 흘리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우리의 삶과 사랑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소재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가 그런 영화를 해온 이유가 뭘까. 왜 이토록 징글징글한 멜러만 만드는 것일까. <내 사랑 내 곁에>는 그의 이전 작품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내 사랑 내 곁에

왼쪽부터 김명민, 박진표 감독, 하지원. (홍보사로부터 제공받음.)

- 추석 시즌작으로 개봉하게 됐다. 기분이 어떤가.
그러게, 그렇게 됐네. 추석시즌 가족용 영화가 됐다. 등급도 좋게 나왔더라.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많이 두렵고 떨린다.

- 네 번째 영화인데 아직도 두렵고 떨리나.
당연히 그렇다. 갈수록 더하다.

- 전작 세 편이 두 실화 소재에 논쟁적인 영화였다. 이번 영화는 실화가 아닌가?
이번에는 실화 아니다.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관객들에게 본의 아니게 부담을 드렸고, 나 자신도 그간 부담이 컸다. 특히 전작에서는 이른바 '선동'까지 했지 않은가. 특별한 목적으로 강요도 했고. 이번에는 양적인 부담을 줄이고 편안하게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 그래서 정말로 편했는가.
그렇다. 아무래도 그런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경계를 잘 타야 하는 문제인데, 이번에는 더 자유로웠다.

- 왜 하필 루게릭 병인가? 특별한 개인적인 계기라도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병 자체가 워낙 잔인한 병인데도 사람들이 너무나 모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환우나 가족들이 겪는 소외감이 크다. 많이 알려져야 치료약 개발이나 요양소 건립같은 것도 될 텐데. 그게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아런 거다. 병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갔을 때 루게릭 병은 온몸이 근육이 빠져서 점점 마비가 되지만 정신은 또렷해서 자신이 죽어가는 걸 스스로 보게 되는 병이다. 대단히 영화적인 설정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주인공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며 진행이 되니까 앞과 뒤가 강렬하게 대비가 되고, 배우들도 있으니까. 그것을 통해 삶이나 죽음, 사랑에 대해 내가 하고싶었던 얘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처음으로 픽션이어서일까, 이전 영화들과 약간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전형적인 신파멜로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는 듯 보인다.
말랑말랑해졌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 지수가 '완전'이란 말을 많이 쓰던데.
내가 '완전'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완전', '절대' 이런 단어들. 결론을 지을 때 잘 쓰는 말이다.

- <내 사랑 내 곁에>로 오면, 종우(김명민 분)가 먼저 사귀자고 하는 장면부터 인상적이었다. 보통의 신파 멜로에서는 반대이지 않은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는 한사코 거부하고 다른 쪽은 순정적으로 설득하며 헌신하고.
일부러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런 식의 강박관념도 없고. 이야기를 구성하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됐을 뿐이다. 마지막에 보면 종우가 사귀자고 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나. 영화의 형식적인 구성에 대해서 고려했을 뿐이다. 다만 죽음을 다루는 여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을 가진 여자, 그러나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컴플렉스를 가진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남자의 마음은 뭘까, 그걸 생각했다. 이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에 이유가 드러나니까.

- 두 사람은 결과를 알면서도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비극이 예정돼 있다고 하면 일단 피하지 않는가.
그것도 실은 편견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다만 내가 보고싶은 사랑이 그런 사랑이었던 것 같다. 사랑이란 감정은 때론 삶의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괴로움이 되기도 하고, 욕망이, 설레임이 되기도 하다. 다양하다. 내가 보기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단어에 불과한 것 같다. 여러 가지 감정을 포괄해서 써놓은 그냥 두 글자의 단어. 그래서 좀 뜬구름 같고, 속에 들어가 보면 굉장히 많은 감정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다 뭉뚱그려 사랑이라 부르는 것 같고. 그런 걸 그려보고 싶었다. 이 영화에서의 사랑에도 희생이나 지켜주고 싶은 마음, 설레임, 고통, 후회... 다 들어있지 않나. 결국 이 영화는 사랑이 삶이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사랑이란 것엔 해답이 없다.

-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사랑을 특별한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 수많은 감정들이 합쳐져서 그것이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걸 '사랑'이라 부르는 거지. 연애 초기의 설레임도 사랑이지만, 점차 지내면서 갖게 되는 애증이나 헤어지기 직전 갖게 되는 증오도 다 사랑에 속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도 사랑이고, 질투도 사랑이고...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 영화마다 '사랑'의 의미가 변화하고 확장되는 것 같다.
글쎄, 변화는 아닌데. <죽어도 좋아>가 설레임과 열정의 사랑을 담았다면 <너는 내 운명>은 상대를 지켜주고 이해하는 사랑을 담았다. 설레임도 있긴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거지. <그놈 목소리>는 좀 다른 부모와 자식 간에 있는 좀 다른 의미의 큰 사랑이고. <내 사랑 내 곁에>에서는 또 여러 형태의 사랑들이 있다. 그냥 다른 종류의 사랑들인 거지. 확장된다는 말은 맞는 것 같긴 한데.

- <내 사랑 내 곁에>가 <너는 내 운명>과 쌍둥이 같은 영화라는 생각도 들긴 한다. 외견상 비슷하긴 한데 성격은 정반대인 쌍둥이 말이다.
아무래도 순정적인 측면에서 곁에서 끝까지 지켜준다는 점 때문에 그렇겠지. "어떻게 저렇게 끝까지 지킬까, 나라면 과연 할 수 있을까, 너라면 과연 해줄 수 있니?" 마음 속에는 있으나 실행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인 셈이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얘기는 두 영화가 분명 다르다. 본질이나 질과 양이 다르다기보다는 그냥 종류가 다른 슬픔인 거다. 눈물이 나도 다른 눈물이 날 것이라고, 만들면서도 생각을 했다. 본 사람들도 다르단 얘길 하고. 똑같이 울어도 그 눈물과 이 눈물은 차이가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양은 잘 모르겠는걸. <너는 내 운명> 쪽이 더 많지 않을까 싶은데. (웃음)

- 사랑이란 것 자체에 이기적인 속성이 있지 않나. 치사하거나 비굴하거나 폭력적이기도 하고. 이 영화에선 그런 걸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내 버린다. 혹은 보통 다른 영화에서는 '눈빛만으로도 다 통한다'는 식의 설정을 쓰면서 낭만화하는데, <내 사랑 내 곁에>에서는 종우가 눈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됐을 때도 종우의 의도를 지수가 제대로 캐치 못하고 멋대로 해석하는 씬도 나온다. 그러고 보면 당신은 언제나 격정적인 사랑을 다루지만 실은 냉정하다는 느낌이 있다.
내가 냉정하다고? 그렇진 않은데 (웃음). 다만 사랑이란 것이 언제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니까. <너는 내 운명>에서의 커플은 그런 사랑이 가장 어울리는 사랑인 거고, 이 커플은 이 커플의 상황이 있으니 이런 사랑이 어울리는 거고.

- 영화를 보면 언제나 굉장한 격정을 담는데 정작 이를 그려내는 감독의 방식이나 시선은 냉철하고 건조하다는 느낌을 매번 받는다. 인물들의 끓어오르는 에너지와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이 충돌하면서 다시 에너지가 발생하기도 하고.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게 과연 뭘까? 당신은 왜 그런 것 같은가?

- 디테일한 부분에 강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랑찬가들이 생략하는 부분을 굳이 보여줘서인 것 같기도 하고, 글쎄, 나도 당신의 영화에서 왜 그런 느낌을 받는 건지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런 식의 영화들이 취하는 일반적인 영화적 장치나 방법을 쓰지 않고 과정을 솔직하게 그리니까 그런 것 아닐까? 당신처럼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 지나친 미화도 하지 않고 말이다.
더 영화적으로 할까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마지막에 둘이 여행을 간다는 설정을 하거나, 다른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 그러지 않은 것은 그럴 여유도 없을 뿐더러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 외출 정도라면 몰라도... 그것도 이 영화에선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여자가 남자를 끝까지 사랑하다 행복하게 보내주는 것이니까. 보내주는 것이 슬프고 가슴아플 수도 있지만 오히려 보내주는 사람도, 그 손을 통해 가는 사람도 행복할 수도 있다. 마지막 씬에서 보내줄 때 하지원 양에게 울지 말자, 잘 보내주자고 말했다. 종우도 행복하고 보내는 지수도 행복하게,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결국 죽음을 맞고 아파한다는 점에서 비극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통해 마지막을 정리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보내준다는 면에서 행복한 죽음이기도 하다.
어차피 종우는 처음의 소망대로 된 것이고, 난 작위적이라 해도 해피엔딩이 좋다. 누군가 죽었기 때문에 언해피한 건 아니지 않는가. 그게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난 이 영화가 비극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극이라고 한다면 통념을 따르는 사람이겠고, 비극이 아니라고 생각해준다면 나의 의도에 부합해주는 사람이겠지.

- 근데 영화 앞부분에서 서로 연애하는 장면은 조금 닭살이던데.
다들 그렇게 사랑하지 않나? 다만 우리가 들키고 싶지 않고 꺼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보통은 다들 처음에 그렇게 시작하고 절정에 이를 때도 마찬가지다. 다만 나는 그것을 솔직하게 보여줬을 뿐이다. 그걸 닭살스럽다, 유치하다고 하면, 일종의 부끄러운 감정 때문이 아닐까? 정작 연애를 하는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데 남들이 보면 그럴 수 있으니 보여주기가 싫은 거지. 난 그게 솔직한 연애라 생각한다.

- 역시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이 너무 직설적이고 작위적이란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긴 한데, 나는 굉장히 좋은 매치라고 생각했다. 그 매치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극적 장치가 될 수도 있고, 죽음에 대해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길 담을 수도 있으니까. 행복하게 준비하는 죽음을 얘기하고 싶었다. 죽음엔 정말로 순서가 없고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죽는 순간 스스로도 저렇게 행복하게 준비하면 좋겠다 싶더라.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지수를 장례지도사로 설정한 건 일부러 그렇게 했다기보다, 말하자면 '우연히 했지만 결국 운명'이었던 결과다. 실제로 장례지도사를 만났다가 그 분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다. 물론 환자를 곁에서 끝까지 지켰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직업이 장례지도사이고 세상의 편견을 받는 분이었다. 가족 중 한분이 돌아가셨을 때 만났는데 실제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이 분이 영화 마지막의 자막에서 스페셜 땡스투에도 나간 분이다. 우리 영화에서 장례지도 자문도 해주셨다.

- 서양에선 삶과 죽음을 대척적인 것으로 보고 동양에서는 죽음을 삶 안에 있는 것으로 본다고 보통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실제 우리 삶에선 안 그런 것 같다. 영화 속 노인분들의 장면도 그렇고.
그런 행사를 하면 영화에서 나온 대로 정말로 노인들에게 두들겨 맞는 게 현실이다, 아이러닉하긴 하지만. 그래서 관념과 통념이 무서운 거다.

- 사실 당신의 영화들은 절절한 사랑을 다루고 순정을 중요한 키워드지만 네 편의 영화 모두에 죽음이 직접적으로 있거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죽음과 사랑 간의 관계를 동전의 양면으로 보는 건가?
그런 건 아닌데.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왜 그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 글쎄, 지금의 감정이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너는 내 운명>에서 "하루를 살아도 은하랑 살다 죽을래"라고 하는 것도 지금이 더 중요하단 얘기니까. 이번의 사랑도 그렇다. 오히려 지금의 삶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죽음이 드리워져 있을 순 있겠지만. 일부러 계산한 건 아닌데.

- 죽음이 앞에 있기에 더 처절한 사랑을 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네 편 다 그렇다.
그런가? 내가 어디 가겠는가, 박진표인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다.

- 사실 어제 <그놈 목소리>를 다시 봤다.
보는 게 부담스러웠을 거다. 그런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부담스러우면 그건 행복하지 않은 것이니까. 그나마 공소시효가 늘어나서 기쁜 마음은 있다. 물론 내 영화 때문은 아니고, 계속 움직임이 있었던 거지만, 어쨌든 <살인의 추억> 때부터 촉발돼서 끝마무리 되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에선 좋더라. 아마 10년이 늘어나서 25년이 됐지? 물론 소급은 안 됐지만. 공소시효나 그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도 신도 아닌데 누가 누구를 벌할 것이며 기간을 얼마나 어떻게 할 것인가를 어떻게 정하는가.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소위 사회의 통념을 이끄는 사람들, 규칙을 만드는 사람은 사회의 소수이다. 이게 참 말이 안 되는 거라 생각한다. 그 아픔을 피해자가 용서 안 했는데 법이, 나라가 어떻게 용서하는가? 여기서 신까지 간 것이 <밀양>일 것이다. 희생정신, 용서, 이런 게 신의 뜻이기도 하지만... 난 모르겠다, 우린 인간인데, 어떡해야 할지. 그런 답답함이 있다. 난 학문적, 철학적으로 정립이 안 된 인간이라 적확한 단어로 구사할 수 없지만, 상식의 수준에서 말했을 때 그런 식의 답답함이 있다.

- 다시 <내 사랑 내 곁에>로 돌아와서, 주인공은 종우와 지수지만 병실의 다른 환자들의 사연도 비중있게 다룬다.
애초에 구상의 시작이 병실이었다. 그 중 메인을 이끌어가는 사람들로 커플을 설정하고 옆에 나머지 사람들의 사연을 배치한 거지. 그 커플뿐 아니라 다들 나름대로의 사랑과 희생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곁에서 지켜주는 게 얼마나 힘든가, 곁에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 숨쉬고 살아있단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그게 잘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는데, 종우와 지수 위주로 볼 때에는 그 장면들이 감정이입에 방해가 된다고도 하더라. 어떤 것을 기대하고 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텐데 나에겐 병실 사람들이 다 소중한 존재들이다.

- 병실 자체가 죽음과 삶이 사이좋게 공존해있는 공간의 느낌이었다.
병실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면 내가 굳이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죽음과 사랑 외에도 유머가 있지 않나. 웃기려고 집어넣었다기보다 그런 처지나 상황에 놓여있어도 '사는 건 사는 거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밥도 먹고 웃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좌충우돌도 하는 거지. 이런 것들은 그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들한테도 특별한 거다. 보여주기에 급급하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지만, 보여주고 열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도 상당히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 보통의 신파 멜로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이와 사랑에 빠지는 상대들은 아무리 그것이 숭고한 희생이나 사랑으로 포장된다고 해도 다소 피학적이거나 자기연민으로 치닫는 듯한 느낌을 주곤 한다. 그런데 지수는 오히려 남들이 두려워 외면하는 것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고 대면하는 인물로 보였다.
그런 직업을 가졌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봐왔고. 고인들을 자신의 손으로 천국으로 보내드리는 직업을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런 양면을 가진 인물이다.

- 직업이 그런 거랑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런 상황인 건 다른 문제 아닌가?
그러니까 중간에 갈등하는 거지. 지수를 단순한 한 명의 여자로 보자. 그녀의 여자로서의 가장 큰 약점은 뭘까? 손일 것이다. 결국 이것도 편견의 결과물이지만. 그런데 가장 콤플렉스인 손을 가장 예쁘다고 말해주는 남자를 만난 거다. 여자로서의 지수만 보면, 그게 가능할 것 같다. 아무리 얼마 안 있어 죽는 남자일지라도. 그게 무리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천사가 어딨냐"고 반응할 텐데, 그런 사람에겐 이 영화가 판타지가 될 것이고, 나같은 사람에겐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거겠지.

-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오히려 닥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란 생각도 든다. 사실 기존의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교육받은 바로는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먼저 보내줘야 할 것 같고, 영화에서 종우도 그러지 않나. 그런데 만약 내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지금 날 버리면 넌 정말 나쁜 놈이다"라고 협박꺼지 해가면서 매달리고 싶을 것도 같다. 옳은 것과 하고 싶은 건 서로 다른 거니까.
그래서 그게 다 마음속에 있는 거라는 대사도 있다. "가장 먹기 힘든 게 마음이고 가장 버리기 힘든 게 욕심이다."라고 하잖아. 진짜 마음속에 들어가 보면 어떨까? 삶에 정답은 없는 거다. 만약 마음의 끝까지 가보면 어떨까, 과연 한 마음만 있을까?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이 공존할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마음 속 끝까지 들어가서 토해내는 영화. 내공이 쌓이면 나중에 할 수 있지 않을까.

- 당신이 말하는 '끝까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사랑 내 곁에>도 다른 영화들이 미처 가지 않은 단계까진 간 거 같은데. 지수를 대하는 종우의 태도도, 이기적이라곤 하지만 난 그래서 더 좋았다.
옥연 할머니가 남편의 따귀를 때린달지 하는 장면은 비교적 끝까지 간 거긴 하다. 그런 마음에 의문이 들기도 하고 알고 싶기도 하다. 어쨌든 사람의 마음이니까. 우리는 심지어 사람의 사람까지도 좋게 말하면 상식, 아니면 통념이라고 할 만한 것들에 자꾸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너 그렇게 살지 마" "그건 옳은 생각이 아니야" 등등. 그게 맞는 경우도 있고, 아닌데 통념인 경우도 있겠지. 죽을 날을 받아놨다고 해서 프로포즈를 못할까? 저게 말이 되느냐 싶은 거라면, 결국 그런 통념에 맞춘 생각이겠지. 난 그냥 만약 그렇게 프로포즈한다면 어떨까 싶었다.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분명한 이유가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면 이유가 충분히 있다.

- 한쪽이 신체적으로 불행을 당하거나 했을 때 곁을 지키는 것을 두고 보통 '숭고한 희생'이라고 찬사를 바치는데, 그런 찬사가 약간 껄끄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렇지. 영화 속에서건 실제에서건, 그런 사람들이 찬사를 받자고 그런 것도 아닐 텐데. 그게 꼭 자기는 싫지만 순전히 상대방을 위해서만 하는 그런 것만도 아니다. 자기가 싫으면 하겠는가. 자기도 좋으니까 하는 거지. 그것을 판타지라고만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스스로를 가두는 게 아닐까.

- 지나친 찬사가 오히려 그런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 사랑 내 곁에> 같은 순애보가 영화 속에서만 있을 일이라고 하면 정말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게 돼버릴 것 같아서.
맞다. 물론 사람들이 보기에 집착, 욕망, 승부욕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 당신이 앞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그런 집착이나 욕망, 승부욕도 결국 사랑의 한 얼굴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 남녀가 만나서 에로스적인 사랑을 할 때 보면 승부욕도 분명 사랑의 모습이다. 자기만족도 분명히 있고. "너 아프지 마, 너 아프면 내가 아프잖아."란 말도 따지고 보면 자기 마음 괴롭지 말자는 얘기가 되기도 하잖아. 사랑이란 걸 계속해서 해석해보면 결국 자기만족적인 부분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사랑이 변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거고. 그런 사람들한테는 사랑의 대상이 그 누구여도 상관없겠지. 그 사람도 자기가 그렇다는 걸 스스로 잘 모른다. 상대를 사랑하는 건지 사랑을 사랑하는 건지. 아무래도 나중에 "사랑을 사랑하다" 같은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 보다.

- 그런 말씀을 하시니 사랑에 대해 시니컬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 아닌가.
맞다, 나 시니컬하다. 맹목적이지 않고 사랑을 믿지 않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속마음으로 들어가면, 내가 그리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고 만나고 싶고 듣고 싶다. 그런 사랑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마음 속에는 그런 게 있다, 나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거지.

- 사랑을 쉽게 믿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인가.
판타지지 뭐. 만들고 있는 나도 그런데. 사랑을 관통하고 있는 것을 끝까지 가보면 결국 그런 거 아닐까 싶다. 영화를 만들다 보니 계속 연애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더라. 이런 감정은 뭘까, 저런 감정은 뭘까, 여기 연기는 어떻게 할까, 이후 감정은 어떻게 될까 등등. 그러다 보니 마치 잘 아는 듯 얘기할 뿐인데 사실 내가 뭘 알겠는가.

- 영화로 표현할 뿐 사랑에 대한 철학자가 아닌가.
철학은 좀 갖고 싶다. 학문이나 지식, 철학하곤 거리가 먼 사람이라서.

- 이전에 했던 어떤 인터뷰를 보니, <죽어도 좋아>는 영화감독이 되도록 해준 작품이고 <너는 내 운명>은 상업영화 감독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 없는 게 가늠하게 해준 작품, <그놈 목소리>는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게 해준 작품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내 사랑 내 곁에>는 어떤 의미가 되는 영화인가?
아무래도 <그놈 목소리> 개봉 때라 그 영화 위주로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사람들의 투사라고 생각해 완곡하게 한 대답들이지. 거기서 '상업'이란 말을 빼도 되겠다. 그래서 이번 영화가 어떤 의미냐... 영화를 오래 만들고 싶어서 좀 유해지려고 생각했고 만든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이거 참 어려운 질문이네.

- 꾸준히 만드시지 않았나.
이제 고작 네 편이다. 10편은 넘게 만들어야 그런 표현이 어울리는 거지. 우리나라에서 패턴이나 유행이 짧아서 빨리 하고 빨리 없어지고 이러니까, 그러지 않고 오래 하고 싶은 욕망을 담은 영화다.

- 타협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타협 맞다, 타협하고 싶다. 타협해야 대화도 되고 소통도 되는 거지, 타협 않고 나 혼자 달려가면 결국 외면받지 않을까? 영화를 통해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은 건데. 괜찮다, 타협이라 비난해도. 하도 많은 얘길 들어서. 타협은 중요하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ps. 프레시안무비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실림 (2009.9.23)

2009/11/20 14:20 2009/11/20 14:20

Planet B-Boy

전세계 비보이들, 모이시지?

<플래닛 비보이>는 제목 그대로 전세계 비보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처음에는 뉴욕에서의 비보잉의 태동을 간략하게 다룬 뒤, 곧바로 2005년 전세계의 비보잉 팀들을 만난다. 90년대에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비보잉을 2000년대에 여전히 하고 있는 이들, 심지어 탄생지인 미국의 뉴욕, 브루클린보다 더한 열정과 기교를 보여주는 해외팀들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한다. 주로는 매년 독일에서 열리는 비보잉계의 권위적인 대회인 '배틀 오브 더 이어'와 관련, 2005년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다섯 팀(한국의 '갬블러즈'와 '라스트 포 원', 일본의 '이치가케', 프랑스의 '페이스-T', 미국의 '너클헤드 주')의 뒤를 좇는다. 이중 미국의 너클헤드 주 팀도 전통적인 브루클린의 팀이 아닌, 라스베가스 출신의 팀이다. 그렇기에 <플래닛 비보이>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춤'으로 소통되는 전세계 20대 젊은이들의 열정과 에너지다. 그저 대회에 출전한 팀들의 실력이나 기교뿐 아니라, 팀에 속해있는 멤버들의 고민들에까지 카메라를 들이댄다. 구체적인 고민의 내용은 다르지만, 이들이 청춘을 불사르며 춤을 통해 자신의 꿈과 열정을 시험하고 물아지경의 황홀경에 한발짝씩 가까이 간다는 점만은 똑같다. 사막 위에서 춤을 추든,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 앞에서 춤을 추든, 아니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세트)에서 춤을 추든 말이다.

벤슨 리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선 비보이들, 특히 초창기 비보이 문화를 이끌었던 선구자들은 하나같이 비보이는 랩과 상관이 없으며, 특히 폭력적인 갱스터 랩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임을 강조한다. 이들은 술이나 담배도 별로 하지 않으며, 마약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감독 역시 비보이의 예술성을 강조하며, 흔히 제니퍼 빌즈의 아름다운 몸매와 춤으로만 기억되는 <플래시댄스>의 인상적인 길거리 춤 장면을 인용한다. 비보이들에게는 <플래시 댄스>의 주인공이 제이퍼 빌즈가 아니라 바로 그 장면에서 춤을 추던 전설적인 브레이크 댄서, 크레이지 레그스(Crazy Legs)였다. 사실 <플래시댄스>의 그 장면이야말로 80년대를 지배하던 디스코 열풍을 한순간에 브레이크댄스 열풍으로 뒤바꾼 역사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벤슨 리 감독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고자 하는 것은 전세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그 열정과 에너지다. 배틀오브더이어 대회의 장면들은 감각적인 앵글과 빠른 편집으로 박진감을 더해주는가 하면, 이들이 자신들의 고민과 꿈을 카메라에 대고 털어놓는 장면에서는 마치 카메라로 이들을 다독이는 듯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사이에는 간간이 유머가 배어있다.

Flachdance

영화 <플래시댄스>에서 크레이지 레그스(Crazy Legs)가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장면.

하지만 <플래닛 비보이>란 영화 자체가 주는 매력 이상으로, 이 영화가 영화 밖 현실과 만나는 접점 역시 흥미로운 고찰을 제공한다. 모든 하류문화란 처음부터 그것이 의도했던 아니던 주류의 가치와 문화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대체로 하류문화란 그것을 생산하고 즐기는 이들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건, 이런저런 폄하를 비롯해 심한 경우 모욕과 왜곡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비보잉'만 해도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같은 연극이나 숙명여대 가야금 연주단과 함께 한 광고로 알려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전, 소위 가출한 '불량' 청소년들이 새벽의 지하철 역에서 몰입해 추는 괴상한 춤이 '비보잉'에 대해 사람들이 알게 된 첫 이미지였다. 비보잉은 말하자면 신문에서 문화나 예술 면이 아닌, 사회 면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놀이문화나 놀이공간은 거의 없다시피한 채 아이들을 획일적인 교육제도 하에 내몰고 약육강식과 경쟁을 어릴 적부터 체화하게 만드는 사회현실은, 슬쩍 지워지거나 마지못해 동정적 시선과 함께 '구색'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이 추는 춤과 누리는 문화는 손쉽게 '불량'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의 춤과 문화라기보다는 '미국 슬럼가 흑인들의 불량한 몸짓을 흉내내는 것'으로 폄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류문화들의 아이러니한 점은, 그것이 '인정'받기 시작할 때 더 이상 하류문화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모욕과 가치폄하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고유의 예술성을 인정받기 위해 초기 거장들의 노력이 계속되면서, 하류문화는 하나의 예술로, 분야로 고유의 독립성과 가치를 인정받으며 주류에 편입한다. 대신 애초 가졌던 가치전복적 저항성은 탈색되기 마련이다. 사실 그렇기에 '하류'문화이기도 하다.

Planet B-Boy

<플래닛 비보이>의 한 장면. 전해 '배틀오브더이어' 대회의 우승자 자격으로 2005년 출전했던 한국의 갬블러즈(Gamblerz) 팀의 연습장면.

80년대에 뉴욕 브록클린에서 퍼져나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렸고 90년대 국내에 도입된 비보잉은 사실 태생부터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의 문화이긴 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처음 비보잉을 했던 이들 역시 사회와 학교로부터 소외된 청소년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회가 강요하는 주류 이데올로기에서 소외되거나 이를 거부한 청소년들이었다. 그리고 비보잉이 마침내 주류에 편입한 순간은, 한국 팀이 종주국(!)인 미국과 예술의 나라 프랑스, 심지어 집착적인 경쟁의 대상인 일본의 팀마저 제치고 우승을 거머쥔 순간이다. 이제 비보잉은 한국에서 전세계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문화제를 열 정도로 인정받는 예술이 됐다. 하지만 이것은 하류문화가 특히 한국이란 공간에서 주류에 편입하는 과정을 매우 상징적으로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여전히 그들은 좋아하는 춤을 추되 군대와 생계를 걱정하며, 그렇기에 이들의 춤은 예술보다도 '상품'으로만 포지셔닝되는 경향이 짙다. 감독이 영화의 기획 당시부터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었겠지만, 이 영화의 대회(2005년)에서 우승을 거머쥔 '라스트 포 원' 팀이 1년 뒤 숙명여대 가야금 팀과 함께 CF를 촬영했다는 에필로그에서도 확인되는 대목이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자란 이들이 전세계 보편적으로 '비보잉'을 통해 꿈과 도전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담은 <플래닛 비보이>는, 역설적으로 과거 한국에서 하류문화였던 비보잉이 어떻게 주류에 안착하고 마침내 독립된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딜레마와 아이러니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는가를 포착한 흔치 않은 다큐멘터리가 됐다. 영화가 끝을 맺은 그 다음의 이야기야말로, <플래닛 비보이>가 문화상품 소비자인 우리에게든 비보이들에게든 정말로 던져준 숙제가 되는 셈이다.

ps. 10월 20일(2009년) 프레시안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나간 글.

ps2. 미국의 소니에서 이 영화의 판권을 사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로 리메이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감독은 벤슨 리, 하지만 아직 프리-프리덕션 단계라는 듯.

2009/11/15 00:51 2009/11/15 00:51

부산에 초청된 제인 캠피온의 신작 <브라이트 스타>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실화를 토대로 한다. 25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그는 생전에 딱히 그 위대한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지는 못했다. 어릴 적 천애고아가 되고 생계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어찌어찌 의대를 졸업해 의사 자격증을 3년만에 땄다는데, 그가 의학엔 별 관심이 없고 시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었던 것을 아는 가까운 친구들, 특히 시인 / 시인 지망생 친구들은 그가 3년만에 의사자격증을 딴 것에 대단한 질투와 허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키츠는 패니 브론과의 절절한 연애로도 유명한데, 패니가 말하자면, [오만과 편견]으로 쳤을 때 미스터 다아시 같은 남자 하나 낚으려고 사교계에서 좀 나대는, 엘리자베스 베넷 정도 가문의 여자였던 모양이다. 리즈 베넷이야 지성미와 유머가 풍부한 여인이었지만 패니는 또 그런 타입은 아니었던 듯, 영화 <브라이트 스타>에서도 키츠를 후원하는 그의 작가 친구 찰스 브라운은 패니를 너무나 못마땅해 해서, 그녀를 "남자나 꼬시려고 사교계에서 꼬리 흔들고 다니는 무식하고 허영심만 센 여자" 취급을 한다. 하지만 패니를 그리는 제인 캠피온의 시선은 그닥 삐뚜름하거나 시니컬하지 않다. 영화의 초반, 키츠를 처음 사교파티에서 만난 뒤 패니가 키츠의 시를 그 앞에서 읊으면서 작업 한번 들어간 뒤, 그녀는 "시를 공부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며 다시 키츠를 찾아간다. 물론 이 역시 삐뚜름하게 보자면 '작업의 2차 작전'으로 보일 수 있고 제인 캠피온 역시 그렇게 보일 수 있음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찰스에게 패니의 얄팍함이 폭로당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제인 캠피온은 패니의 이런 에피소드를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다른 방향에서 패니의 진정성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시켜 버린다. 영화가 끝나고 기억되는 것도 그녀가 찰스에게 봉변을 당하며 그 얄팍한 허영심이 폭로당한 것보다는, 키츠에게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갔을 때 그 반짝이던 눈빛, 그 눈 안에 담겼던 동경과 열망이다. 나처럼 시에 문외한인 사람에겐 그 장면이 더욱 크게 남는다. 나 역시 영화가 끝난 뒤 "키츠의 시를 알고 싶다, 이해하고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들었으니까. 하여간 <브라이트 스타>에 대한 리뷰는 이미 여기에 쓴 바 있고.

Bright Star

존 키츠, 혹은 존 키츠로 분장한 벤 위쇼의 고혹적인 눈. (<브라이트 스타>)

며칠 전 모 극장을 갔다가 바로 옆 서점에서 민음사에서 출간한 김우창 번역의 키츠의 시선집 [가을에 부쳐]를 샀다. 이후 웹 검색을 해보니 그 외에 키츠에 대한 다른 책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오래 전에 대학출판부 같은 데에서 나왔다가 절판, 절판, 품절.) 이 기회에 영국 낭만파 시인들에 대해 동냥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낭만주의 문학'같은 키워드로 돌려봤지만 역시 헛수고다. 사실 또 다른 방식의 치열한 시대정신이었던 낭만주의가 국내에서는 현실도피용으로 포장되고, 그에 따라 리얼리즘이나 자연주의를 신봉한 이들에겐 또 다시 부당하게 폄하되는, 그런 식의 분위기가 없었던 것 같지 않다. 결국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형식의 외피와 감정적 나르시시즘에만 집착하고 과장한 것 정도로 오해된 분위기가 있달까. 아니 근데 센티멘털리즘과 로맨티시즘이 동의어는 아니잖아, 그게 문학이든, 회화든. 영화쪽으로만 보자면, 근래 들어 국내에서도 조금씩 낭만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엔 최근 허진호가 내놓은 <호우시절>이야말로, 제대로 된 낭만주의의 본격적인 부활의 바람의 서두에 놓아야 할 것같다. "허진호가 변했다"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흥미롭기는 하지만.

외서 쪽을 돌려보니,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문고판으로 그의 주요 시와 편지 일부를 편집해놓은 책이 보인다. 랜덤하우스에서는 그의 시 전체를 모아놓은 책도 내놓고 있는 상태다. 오디오북으로는, 새뮤얼 웨스트와 마이클 쉰이 낭송한 CD도 보이고. 마이클 쉰이, 그러니까 <더 퀸>의 토니 블레어와 <프로스트 vs. 닉슨>의 프로스트로 나왔던 배우인 그 마이클 쉰이 맞나 싶어 찾아보니... 허허, 맞네! 새뮤얼 웨스트는 좀 낯선 이름이라 찾아봤더니 <반 헬싱>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출연했다는데 필모그래피가 어째 다 단역 및 조연. 그... 근데, 잘 생겼다? 허걱, <하워즈 엔드>에 조연으로 출연해 BAFTA상 남우조연 부문 후보로 올랐었어? 뭐, 옥스포드 출신? 런던드라마평론가협회 세익스피어상 수상... 엄훠 나 이거 사야 하는 거 맞는 거? 뭣보다 잘생긴 것에 침 주르릅... 아니, 잘생기기도 잘생겼지만 딱 목소리 멋있게 생겼단 말이야! 예컨대 케네스 브래너의 목소리로 세익스피어 낭독을 듣는다고 쳐봐, 그게 그냥 목소리인가? 주르르 몸이 녹아내려 황홀경에 빠뜨릴 천상의 음악이지!

<브라이트 스타>의 말미에도, 그러니까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 영화에서 키츠로 출연한 벤 위쇼가 나지막하게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를 낭송한다. 정확히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 나오기 시작해, 마지막 카피라이트 표시와 제작사 로고가 끝날 때 낭송도 끝이 난다. 벤 위쇼의 나직하면서도 팬시하고 발음 좋은 목소리와 키츠의 시가 어우러져, 비록 눈은 자막을 뒤쫓느라 정신없었긴 해도, 도저히 그냥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게 나만 그런 건 아닌 게, 대체로 아무리 영화제라고 해도 엔딩타이틀 올라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대면서 일어날 듯 말 듯하며 짐을 챙기지만 이 영화의 자막 땐 아무도 그러지 않더라. 만약 영화가 국내에서도 정식으로 개봉한다면, 그 시의 낭송을 꼭 즐기시기 바란다.



[부록] John Keats, 'Bright Star, Would I were Steadfast As Thou Art


ps1. 온라인에서 이런 페이지도 발견. 참고하시라.

ps2. 듣자하니 벤 위쇼는 영화 찍기 전엔 키츠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잘 몰랐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인 캠피온의 벤 위쇼 칭찬은 정말... 으하하하! 처음 만나자마자 느낀 것이 "세상에, 당신 정말 아름다운 피조물이잖아!"였다니, 난 캠피온 언니의 취향이 듬직한 돌쇠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출처는 여기(새 창으로 열기).

2009/10/21 02:17 2009/10/21 02:17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던 제인 캠피온의 신작 <브라이트 스타>는 놀랍게도 실화다. 영국의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실제 사랑을 극화한 이 영화는 다소 실망스러웠던 <인더컷>을 제외하면 1999년작 <홀리 스모크> 이후 별다른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던 제인 캠피온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역작이다. (그나마 그 <홀리 스모크>도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지만.)

25살에 폐병으로 요절한 존 키츠는 죽기 몇 년 전 바느질과 패션에 두각을 나타냈던 패니 브론과 만나고, 그녀가 바로 옆집으로 이사온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3년간 계속된 이 사랑은 존 키츠의 시의 세계를 더욱 깊고 심원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키츠는 시인으로서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호된 악평에 시달렸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읜 뒤 만성적인 가난 때문에 의사 자격증을 따야 했던 그는, 시에 전념하기 위해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찰스 브라운의 재정적 도움에 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었다. 찰스 브라운은 패니 브론을 "남자나 꼬시려 들며 시는 전혀 모른다"며 경멸했고, 심지어 그녀와의 사랑이 키츠의 시 세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겨 이들의 사랑을 번번이 훼방놓았다. 특히 키츠가 폐병에 걸린 이후에는 더욱, 그녀와의 사랑이 키츠의 병세를 오히려 악화시킬 것이라 여겨 번번이 그녀와의 사랑을 방해한다.

키츠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찰스 브라운의 반대뿐 아니라, 가진 것 하나 없었던 키츠에 대한 주변의 우려와 반대 역시 이들의 사랑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낭만적인 사랑이란 극렬한 반대와 억압 앞에서 오히려 더욱 찬란하게 불을 태우는 법이다. 가난 때문에 머뭇거리던 키츠도, 남자들의 구애가 장난이었던 브론도 점차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브라이트 스타>가 내뿜는 아름다움은 일견 상호 모순적으로 보일 듯한 요소들이 서로 상충하면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있다. 이들은 서로를 끝까지 '미스터 키츠'와 '미스 브론'으로 칭할 만큼 당시 격식과 예법을 충실히 따른다. 브론의 동생들이 언제나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한 만큼 단둘이 은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힘들었다. 서로 시구를 주고받으며, 가고 오는 데에만 며칠이 걸리는 편지로 서로의 연정을 확인하고 주고받는 만큼 지금 현대인의 눈에는 지나칠 정도로 억압적이고 답답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과 손을 맞대고 상대가 창밖에서 거니는 모습을 보며, 상대가 내는 자그마한 기척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이런 와중에 상대가 보낸 편지가 너무 짧다고 자해 소동을 벌이거나, "나비가 되어 함께 날아다녔으면 좋겠다"는 연인의 편지에 온 방안을 나비로 채우는 천진한 열정이 영화의 온도를 그 어느 다른 멜로영화보다도 뜨겁게 올린다. 이들의 '억압 속에 꽃피우는 열정'을, 제인 캠피오는 매우 치밀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내며 보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이 영화를 먼저 접한 해외의 평들이 한결같이 "순결한 금욕주의 속에 빛나는 열정적 에로스"를 지적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측면에서다. 노골적으로 야한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지만, 서로 깍지를 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거나, 시구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선 에너제틱한 정서적 흥분과 에로스가 흘러넘친다. 이런 '은밀한 에로스'는 엔딩 타이틀이 흐르는 동안에도 계속된다. 엔딩 타이틀의 마지막 카피라잇 로고가 나올 때까지 벤 위쇼가 나지막히 낭송해주는 키츠의 시를 듣고 (자막으로) 보노라면, 시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사람조차 곧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존 키츠의 시집을 사고싶을 정도다. 혹은 영화 초반에 시를 이해하고 배우고 싶다며 키츠를 찾아가 시 수업을 듣는 패니 브론의 장면이 새삼 환기되며 그 마음이, 그 심정이 새삼 다시 절절하게 다가오거나.

<향수>로 주목받은 벤 위쇼는 섬약한 외모 속에서 격정을 뿜어내는 존 키츠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게 연기하고 있고, <엘리자베스타운>, <골든에이지>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던 애비 코니쉬가 패니 브론 역을 맡아 사랑에 들떠 폴짝거리는 소녀와 현명하고 듬직한 반려자를 섬세하게 연기해 낸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리암 니슨의 아들로 출연했던 꼬맹이 토마스 생스터가 패니 브론의 남동생 사무엘로 출연해 어느 새 훌쩍 자란 모습을 보여준다. <내 책상 위의 천사>와 <쉘로우 그레이브>에서 주연을 맡았던 케리 폭스도 출연해 패니 브론의 어머니 역으로 듬직하게 패니의 어깨를 감싸준다. 영화제 중 상영이 아직 두 번(12일 및 15일) 남아있다.

ps. 프레시안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린 글

ps2.  급하게 쓰느라 이 모양... 영화 보자마자 한 시간만에 휘갈겨썼으니. 그러니 어쩌면 이 ps2.야말로 진짜인데요.

'격정적인 사랑' 하니까 뭔가 대단히 규격화된 어른의 사랑 같은데다 자고 일어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어쩐지 영화에 대해 제대로 쓴 리뷰 같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이들의 사랑은 딱 사춘기 "소년, 소녀를 만나다"로 요약될 수 있거든요. 귀여워요. 너무 귀여워요. 사실 둘은 한번도 섹스를 안 하거든요. 자고싶다 어쩐다 하는 장면도 여자가 "널 위해 뭐든 할 거야"라고 은근한 암시를 건네자 남자가 "나도 양심이 있지"라며 정식으로 결혼한 뒤를 기약할 정도. 자해소동이니 뭐니 하는 것도 그러니까 딱 10대 중학생 소녀가 울며불며 난리치다가 팔에 1센티짜리 상처내는 것쯤으로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하긴 이들 나이가 20대 초중반이었단 말이죠. 제인 캠피온이 참 대단한 것도, 지금은 '대시인'으로 추앙받는 키츠의 이름에 너무 짓눌리지 않고 그 사람과 패니의 그 '소년, 소녀스러움'을 제대로 살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만큼 생동감이 넘쳐요. 오죽하면 이들의 철없고 귀여운 모습에 몇몇 장면에선 웃음이 막 터집니다. 그러면서 격식을 차린 옷과 대화, 동네에 퍼질 소문을 의식해야 하며 주변의 감시(!)를 받는 연애같지 않은 연애를 하면서 자기들끼리는 너무나 심각하고 진정이 넘치기 때문에 이상한 에로스가 넘치는 거지요. 뭐 뻔하고 통속적인 내용이라며 별로 안 좋아할 분들이 더 많아보이긴 하지만, 영문학에 조예가 깊거나 그쪽 빠거나 혹은 빠도 못 되고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동경하는 저같은 사람들에겐 우왕ㅋ굳ㅋ@.@하며 눈물 뚝뚝 흘릴 영화 되겠습니다. 영화가 개봉되면 필히 다시 제대로 된 리뷰를 써야 할 영화.

ps3. 주인공 역을 맡은 애비 코니쉬는 "등발 좋고 덜 날카로운 니콜 키드먼"으로 보이는 면이 있어요. 까만 머리긴 해도 얼굴이 많이 바뀐 지금이 아닌 예전의 니콜 키드먼의 얼굴과 닮은 부분이 있어요. 다만 니콜 키드먼보다는 좀더 무던하고 둥글둥글하달까.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어쩐지 이런저런 면에서 <여인의 초상>의 예술적 실패 지점을 만회하려는 야심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ps4. 벤 위쇼와 애비 코니쉬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이들을 감시(!)하는 애비 코니쉬의 어린 여동생의 모습을 보자니 <피아노>에서 엄마 뒤를 쫄쫄 쫓아다니며 엄마의 사랑을 감시(?)하던 안나 파퀸이 살짝 겹치기도. 하지만 이 소녀는 안나 파귄보다는 어쩐지 살짝 통통한 니콜 키드먼 아역으로 보여요. 얼굴은 안 닮았지만 무엇보다 창백한 피부에 빨간 곱슬머리 때문에.

ps5. 근데 제인 캠피온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대체로 나이가 좀 있는 듬직한 스타일이었는데. (뭐 돌쇠 스타일도 가끔.) 그들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벤 위쇼는 제인 캠피온 영화치고는 약간 낯선 팬시함을 영화에 불어넣어 주고 있기도 해요. 이 영화에선 그게 매우 성공적이기도. 그러고보니 벤 위쇼는 살짝 고전적이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퇴폐미가 항상 있었던 듯.

2009/10/10 07:47 2009/10/10 07:47

이송희일 감독과 처음 알게 된 것은 감독과 기자, 혹은 감독과 영화팬으로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후 감독과 영화팬의 관계가 되었고, 다시 감독과 기자 사이가 되었다. 요즘은 감독과 기자 외에도 인디포럼 상임작가회의에 함께 속해있는 관계, 이기도 하다. (그는 인디포럼 상임작가회의 의장이다.) 이 인터뷰는 지금만큼 친해지기 전, 서로 예의를 지키며 조금 어려워하던 그런 때인데, <디워> 파동이 나고, 그가 말도 안 되는 왜곡 발췌 기사로 어마어마한 오해와 오독 사이에서 악명(?)을 떨치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촛불이 한참 시작되던 딱 그 때였다. 딱히 새 작품이 공개된 시점이 아니라 하더라도 <디워> 파동 때부터 그를 꼭 인터뷰하고 싶었다. 벌써 시간이 훌쩍 흘러, 당시 프리 프로덕션이 한창이었던 그의 두 번째 영화 <탈주>가 곧 열리는 부산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대체로 많은 감독들이 서퍼모어 콤플렉스를 겪는다. 하지만 훌륭한 예외도 많았다. 최동훈 감독의 경우 <범죄의 재구성>이 지나치게 평가절상되었다고 생각했지만 <타짜>에 대해서는 입을 떡 벌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탈주>도 그런 작품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근데 말이다. 이 기사를 쓸 때만 해도 내가 그 다음 해 인디포럼의 프로그래머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냔 말이다. 흐흐.) 이 기사는 처음 프레시안의 이 페이지(새 창으로 열기)에 게재되었다.



지난 6월 5일 폐막한 인디포럼의 상임작가의장이기도 한 이송희일 감독은 장편 데뷔작 <후회하지 않아>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인감독이다. 불과 1억 원의 예산으로 찍은 영화 <후회하지 않아>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독립영화로서는 기적이라 할 무려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바 있다. 한국영화 위기설이 더 이상 '설'이 아니라 현실이 돼버린지 오래인 지금, 첫 영화에 이어 신작인 <탈주> 역시 저예산으로 준비하고 있는 이송희일 감독은 과연 독립영화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탈주>의 제작상황은 어떻게 돼가고 있을까? 촬영준비로 여념이 없는 이송희일 감독을 <탈주> 제작사무실 한 켠에서 만났다.

- <탈주>의 예산 및 진행상황은 어떤가?

영화진흥위원회 HD지원작에 뽑힌 영화라 4억이 확보됐고 여기에 2, 3억 가량이 더 필요하다. 이 부분 투자가 안 돼서 제작사인 청년필름에서도 고민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경우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일단 찍고 그간 촬영한 분량을 일종의 데모 테입처럼 만들어 중간이라도 투자를 받는 방법은 어떨까 궁리하고 있다. 전체 순제작비를 6억에서 7억 가량 잡고 있는 셈인데, HD 지원작은 마케팅비를 포함해 10억을 넘기면 지원받은 4억을 고스란히 토해내야 하기 때문에 마케팅비까지 10억 안으로 끊어야 한다. 영화는 6월 9일 크랭크인해서 약 30회차에 걸쳐 촬영할 예정인데(편집자 주 - 인터뷰 이후 크랭크인 날짜가 한 주 연기되었다.), 기술 스탭들이 다들 미쳤다고 난리다. 서울에서 첫 촬영을 하고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찍은 후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가, 마지막 장면은 다시 지방에서 찍고 싶다. 워낙 돌아다니는 곳이 많기 때문에 스케줄이 좀 빡빡하게 될 듯하다. 마지막 장면은 촬영 맨 마지막에 지방에서 찍었으면 하는 욕심을 내고 있고, 총이라던가 하는 것도 욕심을 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게 저예산 규모에 맞는 영화인가 싶기도 하지만.

- <용서받지 못한 자>의 경우 국방부의 지원을 받지 않았나?

국방부가 원래 좀 예민해서, 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굴었다고 들었다. 우리 경우 나중에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방부의 지원에 대해서는 '원천적 포기'의 입장이다. 탈영병이 무장 탈영하는 얘기는 사실 세지 않나.

이송희일 감독

직접 찍은 (발)사진이라능.

- 처음부터 끝까지 쫓는 자와 도망치는 자의 '달리는' 이야기라고 들었다.

한 마디로 '멈추면 죽는다'는 거다. 마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 풍경과 비슷하다. 엊그제 집회를 갔는데 안 잡히려고 계속 도망 다니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 '멈추면 잡힙니다!'라고 소리치는 걸 들었다. 마치 우리 영화와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예전부터 탈영병 이야기를 꼭 해보고 싶었다. 예전에 혼자 습작해본 소설도 탈영병에 관한 얘기였고. 다만 머릿속에 그렸던 건 좀 올드해서 현대적으로 각색하는 데에 힘이 들었다. 예전에 단편이나 <후회하지 않아>의 작업을 할 때는 혼자 콘티도 없이 현장에서 배우와 스탭들의 의견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연출부들과 함께 각색했다. 처음 시나리오엔 주인공들이 은행도 털고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과연 그게 맞나 생각이 들어서 결국 뺐다. 주인공 세 명이 탈영하게 된 계기는 모두 실제 사건에서 따온 것이다. 이 영화도 그렇고 다음 영화들도, 장르가 호러가 됐든 아니든 당분간은 쫓기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찍을 것 같다. 세상이 별로 안 좋으니까. 사르트르 시절에 활약했던 보리스 비앙이라는 가수가 부른 '탈영병'이라는 샹송이 있는데 가사가 너무 좋다. 군대 가지 말자고, 죄없는 사람들에게 총을 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원래 가사는 '쫓으려면 얼마든지 쫓으세요, 내겐 총이 있으니까'라는 내용이었지만 가사가 검열되면서 '쫓으려면 쫓으세요, 제겐 총이 없습니다'로 바뀌었다. 프랑스에서는 우리의 '임을 위한 행진곡'만큼이나 유명한 노래다. 그 노래의 정서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 로드무비라 할 수도 있겠다. 쫓는 사냥꾼들의 모습도 넣지 않을 거라고 밝혔는데.

처음부터 쫓는 이의 장면을 넣지 말자고 했던 건 사실 돈이 없어서다. 탈영병의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캐릭터가 부딪히는 가운데 나오는 스릴을 그리려는 것도 아니고. 사실 나는 장르영화를 매우 좋아하고 이 영화 역시 그런 장르문법을 어느 정도 차용했다. 그러나 한국영화엔 그런 게 별로 없다보니 투자를 위해 시나리오를 받아본 사람들이 많이 당황하더라. 내겐 너무나 친숙한 장르인데 사람들은 많이 낯설어하곤 한다. 군대 내부는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처음부터 탈영병들이 하는 영화는 처음이니까. 굳이 비슷한 영화를 꼽자면 세 사람이 계속 도망친다는 점에서 <세상 밖으로> 정도? 단편들의 경우 군대 내 폭력에 대한 내용을 다룬 영화들이나 탈영병에 대한 이야기도 점점 등장하는 것 같다. 다만 아직 장르화되지 않고 장르의 옷을 입은 예가 별로 없어서 그런가 싶긴 하다.

- 헐리웃 영화들에는 원래 그런 장르의 영화가 많지 않나?

원래 <병사의 시>라는 휴가병에 관한 영화를 보다가 내가 만들고 싶었던 탈영병 영화를 여기에 섞자는 생각이 들었고, 여기에 장르의 옷을 입히는 것이 관건인데, 결국 많이 참조한 게 갱스터 로브무비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나 니콜레스 레이 감독의 영화들 말이다. 전적으로 장르영화에 붙지는 않아서 애매하긴 하지만... 한국적인 내용도 들어가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군대를 막 비판하고 그러는 영화는 아니다.

-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영화를 준비하다가 엎었다.

1억짜리 영화를 찍던 사람이 갑자기 50억짜리 영화를 찍는 게 스스로 맞지 않은 옷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또 하나는 한국영화판이 요 몇 년 안에 바닥을 칠 것 같은데 이런 듣보잡 감독에게 누가 50억이나 투자를 할 것이며, 내 성향이 원래 사회비판적이라 내용도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액션영화로 포장한들 누가 투자를 하겠는가 싶더라.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려본 거지. 50억을 갖고 하려던 영화 역시 실은 다소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었다. 그 소재는 언젠가 꼭 한번 영화화하고 싶다.

- 하지만 많이들 단편 몇 편 찍다가 바로 웬만한 예산이 들어간 장편들을 찍지 않나.

신인감독을 소비하는 현상 아닐까. 2000년대 초반쯤 한창 거품이 일 때 영상원이나 영화 아카데미 출신의 감독들을 '젊은 천재 감독'이라 포장하며 데려와 눈먼 돈을 끌어들여 영화들을 찍어댔지만 대부분 결과가 안 좋았다. 트레이닝도 제대로 안 돼 있고 탄탄한 기획 마인드로 접근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결과가 안 좋았던 감독들 대부분이 사라졌다. 일종의 소모품으로 쓰고 버려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신인감독 역시 모두 경쟁을 해야 하는 입장이고, 모두가 나홍진 감독처럼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 독립영화라는 게 개념이 좀 애매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독립영화는 무엇인가?

독립영화란 굳이 얘기하면 1920년대 지하영화들부터 개념이 시작되고, 한국에서 인디영화는 유럽보다는 미국의 개념을 직수입한 면이 크다. 6, 70년대 미국 스튜디오 바깥에서 찍은 영화들 말이다. 인디포럼 행사의 일환으로 독립영화워크숍을 하는데 거기에 가서 '독립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할 때 한 얘기기도 하지만, 고전적인 의미에서 한국 독립영화는 이제 사전적인 의미만 남아있는, 화석화된 개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래 독립영화의 사전적 의미가 자본과 검열로부터의 독립인데,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추격자>가 90년대에 나왔다면 검열 대상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카트린 브레이야 감독의 영화 같은 경우 제한상영가 받긴 하지만 일부의 현상이고. 오히려 이런 검열은 영화보다 방송이 더 심하다. 내 영화는 공중파에서 튼 적이 없다. 공중파에서 내 영화가 상영되면 사회가 그만큼 좋아진 것 아니냐, 하는 좀 건방진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젠 표현수위 때문에 제한을 받는다 아니다는 좀 무의미해진 측면이 있다. 오히려 독립영화들이 훨씬 개인적이면서 멜랑콜리한 감성을 가진 경우가 많다. 반면 상업영화들은 장르 안에서 표현 수위 등을 고민하고 있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면도 그렇다. 요즘은 거의 국가기관에서 지원받아서 영화를 만든다. 이건 물론 비영리를 목적으로 영화를 공공재로 인식하면서 국가에서 출자하는 돈이긴 하지만, 예컨대 1억, 혹은 4억짜리 영화들을 그런 돈으로 만들었다고 했을 때, 과연 무엇이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인가의 문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영진위로부터 돈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극장에서 개봉하면 그 순간부터 '상품'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 아닌가. 엄격하게 기준을 들이대는 순간 모든 게 애매해진다. 그렇다면 독립영화의 정의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건 시스템과 관련한 것이다. 스탭을 어떻게 구성할 것이고 배우 역시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해 감독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과연 얼마만큼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물론 이 역시 애매한 문제이긴 하지만, 단순히 돈의 문제로만 얘기하기도 힘든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신동일 감독의 영화를 보자. 그가 만든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LJ 필름이 제작사긴 하지만 분명 독립영화의 마인드로 만든 영화가 아닌가. 그래서 이번에 인디포럼에서 신동일 감독의 영화를 상영하고, 신동일 감독 역시 자신을 독립영화 감독으로 포지셔닝하며 이번 인디포럼의 트레일러도 제작했다.

- 배급사가 메이저인 프라임인데도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2년 이상 개봉 못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일까.

그렇다. 애매하니까. 사실 청년필름도 상업영화사가 아닌가. <후회하지 않아>도 케이블 판권을 먼저 판 돈으로 제작했고 나중에야 영진위 독립영화 지원책의 일환으로 마케팅비를 2천만원 받았다. 사실 <후회하지 않아> 때문에 독립영화 지원책이 만들어진 면이 있다. 그러니까 1억짜리 영화도 흥행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며 생색내기용으로 만든 제도인데, 이게 살 깎아먹는 역효과가 날 거란 예상이 점점 들어맞고 있다. 1억으로 영화를 찍으려면 스탭 인건비도 그렇게 한계가 너무 명확한데, '1억짜리도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횡행한다. KT&G에서도 1억원 지원책을 내놓고 있긴 하지만, 지금 대부분의 독립영화들은 영진위의 지원금으로 영화를 찍는다. 그래서 독립영화 감독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영진위 영화사의 직원들'이라는 농담이 돌기도 한다. 그렇기에 인디영화란 제작 시스템이란 측면에서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전권을 부여받은 소수의 스타 흥행감독들의 영화도 독립영화로 불러야 하는가?

감독의 자율권 그 자체가 아니라, 감독의 자율권이 작동될 수 있는 전체 제작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저예산 영화도 스탭들은 계약을 다 한다. 계약을 먼저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많은 것이 갈리기 때문이다. 이건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말이 되려면 스탭 노동에 대해 프랑스의 예술노조처럼 다른 방식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예컨대 프랑스 예술노조에 소속된 스탭들은 5개월간 촬영을 했다고 하면 나머지 기간 동안은 최저생계비에 해당하는 실업수당을 받는다.

저예산영화에서의 계약 역시 상업영화에서의 계약을 재현한다. 그렇다면 독립영화는 무엇이 다른가? 독립영화의 전제는 아무래도 독립영화를 한다는 '공동체'의 측면일 것이다. 예컨대 어떤 영화들은 분명 저예산에 게릴라 방식으로 찍었음에도 왜 독립영화라 칭하지 않는가? 왜 누구는 독립영화 감독이라는 레테르를 붙이게 되는가? 이건 감독이 독립영화를 호출하는 방식, 특히 자신을 포지셔닝하면서 독립영화를 지향하느냐, 독립영화 감독의 공동체에 접속하느냐에 따라 배제의 작동 원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배제의 논리보다는 긍정과 포용의 논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다소 선언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독립영화란, 독립영화 공동체 안에서 지향하는 바를 얼마나 자신이 지향하는가이며, 장기적으로는 제작 시스템과 관련된 문제다. 미국도 선댄스영화제가 있기 때문에 저예산 영화는 다 독립영화라 지칭하는 그런 시스템이 존재한다. 저예산 영화가 곧 독립영화라는 공식이 만들어진 게 결정적으로 선댄스 때문이 아닌가. 유럽은 인디영화란 표현 잘 안 쓴다. 오히려 예술영화냐 아니냐로 구분하다. 전세계마다 다 다른 듯하고, 한국에서도 기자들은 물론 내부에서도 이론이 분분하다. 단편영화만 찍으면 구분이 오히려 쉽지만, 장편 3억짜리를 찍고 나면 스스로도 혼란을 느낀다. 그런 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는 한독협이 요즘은 국가의 돈을 지원받아 집행하는 관료 집단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좀 있기도 하고.

- 장편 독립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의 숫자가 적다.

장편영화를 만드는 인디감독 중 내가 제일 나이 많다. 내겐 롤 모델이 없다. 모두들 상업영화 씬으로 달려가거나 그나마도 결과가 안 좋아 사라져 버렸다. 홍기선 감독님의 경우 <선택> 이후 별다른 작품이 없고, <선택>도 애매한 경우다. 사실 독립영화 진영에서 장편 극영화는 이제 2, 3년 정도밖에 안 됐다. 이것도 디지털이 보급되면서 제작비가 줄어서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 맹아 수준이고, 관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영화의 숫자도 한정돼 있다. 하지만 인디영화의 시장 자체는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상영공간의 숫자가 좀더 확보가 됐으면 좋겠지만.

-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스탭들의 인건비라는 측면은 영화노조와 부딪히는 면이 꽤 있을 것 같다.

사실 독립영화에서 스탭들을 그렇게 쓰는 게 또 다른 착취, 또 다른 도제 시스템인 측면이 분명 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 그 자체와 영화의 공공성 부분을 사유하자는 것이다. 영화 스탭들과 관련해 진보신당에서 굉장히 좋은 공약들을 내놓았는데, 이런 것들을 '귀찮게 괴롭히면서' 연대할 마음도 있다. 사실 청년필름에서 저예산영화를 제작하는 방식도 답이 하나밖에 없다. 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예산을 미리 공개하는 대신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다.

- 올해 영화노조에서는 제협 측에 제작비 10억 미만의 저예산 영화에 대해 흥행 개런티 지불을 교섭안 중 하나로 요구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건 충무로의 자충수라고밖에 할 수 없다. 노조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가장 첫 단계인 셈인데, 작년 제협과 교섭안 타결 때 저예산 영화의 부분을 그냥 제끼고 갔다. 그런데 요즘 충무로의 일반 평균 예산이 8억이라고 하더라. 충무로 일반 영화의 예산이 8억이 되면서 작년엔 생략했던 부분에 대해 그런 식의 요구를 하게 된 거겠지. 영화노조와도 잘 연대했으면 좋겠지만, 아직까지는 서로 입장이 겹치는 부분이 적다.

- 헬리캠 후원단을 모집하고 있던데, 그건 뭔가.

탈영병에 관한 영화인 만큼 헬리캠을 사용할 계획인데, 이게 1회 대여비가 상당히 비싸서 후원단을 모집하고 있다. 영화라는 게 한번 보면 끝나는 7,000원짜리 상품이라기보다는, 관객들이 놀이의 일환으로 함께 참여하는 무언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편집자 주 - 이송희일 감독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임시로 만들어놓은 영화 소개 페이지(http://gondola21.com/run/escape2.htm(새 창으로 열기))에서 헬리캠 후원단의 일원이 될 수 있다.

2009/10/01 22:22 2009/10/01 22:22

2008년 전주영화제가 '디지털 삼인삼색'을 위해 고른 감독은 우리에게는 낯선 영화대륙, 아프리카 출신의 감독들이다. 혹자들은 아프리카에서도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소하지만, 아프리카 역시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거장들을 두루 배출해냈다. 2008년의 전주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은 바로 그 아프리카가 배출한 감독들 중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부르키나 파소), 마하마트 살레-하룬(차드), 나세르 하미르(이집트) 감독을 선정했다. 이중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감독은 아프리카가 배출한 거장 중 거장이지만 국내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이름이다. 감독은 다른 감독들보다 더 늦게 한국에 도착해 핸드프리팅과 기자회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나는 자료들을 찾다가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감독이 우리가 몰랐을 뿐 전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은 감독인 걸 알고 깜짝 놀랐고, 기자회견에서 빠진 만큼 따로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위해 준비를 하면서, 심지어 그의 영화는 국내에서 정식 개봉을 한 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한 번 놀라기도 했다. (백두대간이 씨네큐브를 처음 개관하면서 선택한 개관작이 바로 우에드라오고 감독의 <야바>였다. 이 영화는 당시에 비디오로도 정식 출시된 바 있다.) 마침 내가 당시 전주영화제에서 번역한 영화 역시 우에드라오고 감독의 <키니와 아담스>였다.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던 셈이다. 인터뷰를 하고 나서 나는 그 감독이 풍기는 아우라에 한동안 뻑갔(...)고, 아프리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그가 이끌고 있는 아프리카 최대의 영화제, 페스파코를 꼭 방문하고 싶다. 그리고 아프리카 영화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고 싶다. 이 인터뷰는 원래 프레시안의 이 페이지(새 창으로 열기)에 실렸다.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감독인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감독은 우리에겐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베니스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는가 하면 미국의 9.11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 <2001년 9월 11일>에도 참여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쌓고 있는 거장이다. 부르키나 파소 태생인 우에드라오고 감독은 1989년작 <야바>로 칸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이듬해 <틸라이>로 같은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는 <삼바 트라오레(Samba Traore)>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부르키나 파소에서 개최되는 아프리카 최대의 영화제로서 '제3세계의 칸영화제'라 불리는 페스파코(FESPACO : Festival of Pan-African Cinema in Ouagadougou)를 이끌고 있다.

올해 전주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2008 - 귀향>에 <생일>로 참가한 우에드라오고 감독은 동 섹션에서 상영될 자신의 장편영화로 97년작인 <키니와 아담스>를 선택했으며, 이 영화는 2일날 상영된 바 있다. 비행 일정 때문에 기자회견과 핸드프린팅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한 그를 프레시안이 따로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디지털 삼인삼색>에 참여한 만큼 우에드라오고 감독과의 대화는 '디지털'에 관한 것으로 시작됐고 그는 아주 열정적으로 질문에 답했다. 우에드라오고 감독은 폐쇄 직전의 극장 5곳의 운영권을 부르키나 파소 정부로부터 얻은 뒤 이 극장에서 상영할 영화들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은 물론 후배들과 주로 디지털로 작업을 했기 때문에 디지털 작업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이런 경험 때문에 디지털에 대한 견해가 매우 뚜렷했다.

- 필름 작업과 비교했을 때 디지털 매체가 가지는 장단점은 무엇인가?

필름과 디지털은 종류가 아주 다른 매체이기 때문에 비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차에 비유하자면 메르세데스와 벤츠는 기능과 가격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지 않은가. 다만 디지털이 필름에 비해 여전히 공간의 깊이감을 표현해내지 못한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기술적으로 아직 해결이 안 된 것 같다. 그렇기에 디지털이 가진 고유 특성에 대해 주로 얘기해 보자면, 디지털은 매우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장치이다. 또한 필름 작업이 10배에서 20배의 제작비가 들고 조명과 배경 등 꾸며야 할 것이 많은 반면 디지털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필름과 디지털은 광학적인 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단순 비교를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디지털이란 매체가 가진 고유의 속성을 어떻게 더 발전시킬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디지털이 필름에 비해 공간적 깊이감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디지털 작업을 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사실 카메라나 필름 혹은 디지털도 모두 유럽의 발명품이 아닌가? 아프리카처럼 햇빛이 강한 곳에서는 하얀 것은 모든 것을 반사하고 검은 것은 모든 것을 흡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디지털로 영화를 찍으면 이렇게 강한 햇빛 하에서는 배경색이 거의 하얗게 뭉개져버리기 때문에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아침에 해가 뜨기 전 혹은 햇빛이 강해지기 전 오전에만 찍을 수밖에 없으며, 햇빛을 차단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해야만 한다. 아프리카에서 아주 좋은 디지털 영화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그러나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이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게 사실이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올 때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결국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되지 않았는가?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오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모든 기술적 혁신에는 언제나 제약과 반발,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다.

디지털 매체가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질이 아니라 시간의 지속성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건 필름보다 훨씬 자유롭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진 민주적인 매체라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이야기, 남의 눈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할 수 있는 기회를 디지털이 조금 더 쉽게 열어줬다. 앞으로 5년에서 10년 후면 기술이 더욱 발전해서 지금의 제약도 줄어들 것이다.

결국 최종적인 건 같다. 어떤 매체를 사용하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과 같은 인간의 감정이 아닌가. 물론 이것은 이미지를 통해 구현되지만. 디지털이든 필름이든 영화는 이미지다. 다만 도구가 달라지면 제약도 달라지며 작업 도중 얻게 되는 즐거움도 달라진다."

- 영화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국가들도 있는 아프리카에서 디지털이 영화의 발전과 보급에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은 시장의 논리를 고려해야 한다. 디지털로 많은 작업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작을 해도 배급이 안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이지리아와 같은 큰 나라를 제외하면 아프리카에는 작은 규모의 국가들이 매우 많은데 이런 나라들은 인구수도 1,000만에서 1,500만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 중 8, 90%에 해당하는 인구가 극장이 하나도 없는 외지나 시골에서 산다. 디지털로 쉽게 찍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 극장이 없어 배급이 안 되는 것이 더 문제다. 영화는 예술적 산물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산업적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시아는 시장이 있기 때문에 계속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우리는 8,90%의 인구가 영화를 볼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다.

거기에, 세계적으로 봐도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계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그리 열려있는 사회가 아니다. 과연 한국에서 아프리카 영화가 얼마나 상영되는가? 이것이 오히려 더욱 본질적인 문제이다. 디지털로 아무리 영화를 찍어도 시장이 없고 극장이 없기 때문에 결국 TV에서 방영할 수밖에 없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 <야바>가 한국에서 개봉 및 비디오 출시를 거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Idrissa Ouedraogo

별도의 핸드프린팅 장에서. (JIFF제공)

- 당신이 이끌고 있는 아프리카 최대 영화제인 페스파코에 대해 설명해 달라.

부르키나 파소의 수도인 와가두구에서 열리는 경쟁영화제로, 아프리카 사람들이 만든 영화들만 상영한다. 여기에는 디아스포라(해외에 흩어져있는 아프리카인들)들의 영화도 포함된다. 물론 관객들은 해외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영화제로 규모가 아주 크다. 전주영화제는 페스파코에 비하면 '아가'에 불과하다. 영화제 기간 전체가 축제다.

-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아프리카에서 페스파코의 역할 혹은 취지와 의미를 설명해 달라.

7일에서 10일 정도의 단기적인 축제라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극장이 없는 곳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오히려 텔레비전이 영화를 만나는 데에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페스파코는 원래 처음에는 영화제 형태가 아니었고, 흩어져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그들이 각자 겪었던 제작과 배급에 관한 문제들을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단순한 만남에서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도 시장이나 배급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영화를 만들기 힘들지만 감독의 수도 계속 증가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영화제라는 축제 형태가 된 것이다.

처음에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영화가 아프리카의 문제를 아프리카 사람의 눈으로 다룰 수 있는 우리의 무기로 삼을 수 있을 거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러나 그런 이상은 곧바로 현실적인 논리 앞에서 깨져버렸다. 영화가 창조적인 예술인 건 사실이지만 자본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 오히려 그 어떤 다른 매체보다 더욱 자본의 구속을 크게 받는 매체라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곧바로 인식 전환이 왔다. 사실 아프리카는 작은 국가들이 많은데 그런 나라들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며 아프리카의 영화들은 90%가 해외의 지원을 받으며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외부의 지원을 받으며 영화를 만들 수만은 없지 않은가? 내부적 기반이 만들어져야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직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치품이다.

-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작품은 <야바>와 <틸라이>인데 굳이 <키니와 아담스>를 전주영화제 상영작으로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

<야바>와 <틸라이>는 아프리카의 자연과 인간, 그리고 아프리카 내부의 고유의 문제를 성찰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인 반면 <키니와 아담스>는 짐바브웨라는 또 다른 아프리카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것은 실제 아프리카의 또 다른 모습이다. 끊임없이 부자가 되려하고 이것을 '차'라는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를 통해 추구하는 것이다. 사실 서양인들은 아프리카에 대해 보는 눈이나 요구하는 것이 항상 똑같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으며, 아프리카인들 역시 외관상 문화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이라는 본질적 모습은 서양인이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 서양인이 요구하는 한 가지 모습이란 어떤 걸 가리키는가?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식민지 경험을 했고 그 때문에 다른 언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프랑스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고유의 문화가 있으면서 제국주의의 시대에 다른 문화를 타의에 의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두 개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식민지 경험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두 문화가 대화를 하고 내가 다른 문화와 민족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 문화밖에 모른다. 자기의 시선만을 가진 채 다른 이로부터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매우 어리석은 시선이다.

영화 역시 문화적인 산물인데 다양한 교류를 통해 서로 배우려는 노력이 유럽인들에겐 없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문제다. 그러나 다행이고 긍정적인 것은 아프리카의 많은 젊은이들이 유럽과 미국에서 많이 유학을 하면서 이것이 서로 다른 시각과 사고를 교환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식민지 경험을 한 국가의 출신으로 제국인 프랑스에서 유학한 최고의 지식인이자 예술가인 만큼 당신은 프란츠 파농을 연상시킨다.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프리카에 대해 당신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

식민지 시대는 이미 끝났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식민지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을 알아가며 서로 교류하는 것이다. 식민지 경험은 나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통해 다른 문화를 접하고 배울 수 있었으므로 오히려 내가 가진 힘이다. 독립은 1960년대에 됐는데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는가? 아니다, 지금은 옛날의 노예문제보다 더 해결하기 힘든 세계화라는 싸움의 대상이 있지 않은가. 이제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문제가 아니라 세계화라는 현존하는 괴물이 더욱 문제이며 이것은 훨씬 복잡하고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석유값은 나날이 폭등하고 아프리카가 아무리 빈곤에 허덕이고 있어도 아시아는 쌀 생산을 무기로 수출을 안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문제이지, 식민지는 문제가 안 된다. 나는 내 몸 안에서 두 문화를 하나로 만들 수 있으며, 이를 배워 힘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실 식민지 시대에도 아프리카의 많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파리에서 공부했다. 레오폴드 생고르와 에메 세제르가 죽었을 때엔 프랑스에서 대통령이 헌사를 하기도 했다. (편집자 주 - 레오폴드 세다르 생고르와 에메 세제르는 모두 아프리카인으로서 프랑스에서 공부했으며 유명한 시인이자 동시에 정치가이다. 둘 다 흑인정체성 회복운동인 네그리튀드를 이끌었다. 레오폴드 세다르 생고르는 프랑스령이었던 세네갈이 독립하자 최초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36년에 이 유학생들은 프랑스에서 '흑인학생들'이라는 잡지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 서문은 "우리들은 자본주의 부르주아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 가서 느꼈던 지적인 갈증은 바로 자유롭고자 하는 갈증이었다. 이는 단순히 자기가 흑인이고 식민지 출신이니 쟁취해야 하는 그런 1차적인 자유가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자유를 뜻한다. 그러니 식민지 출신 지식인의 정체성 같은 건 내 관심사가 아니며, 그런 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

중요한 것은 타 존재가 있고 그와 교류하고 무언가를 배우며 경험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고 울 수 있다는 건 배우고 경험하면서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경험과 배워서 아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아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나는 아프리카 사람이며 부르키나 파소 사람이다. 내가 한국에서 생활한다면 또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 <키니와 아담스>로 다시 돌아가서, 이 영화를 영어 영화로 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새로운 것에 언제나 관심이 많으며, 다른 언어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사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같은 아프리카에 있음에도 서부 아프리카와는 또 다른, 잘 알지 못하는 아프리카다. 남아공화국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영화 자본이나 시장을 가질 만한 잠재력을 품고 있다. 그런 걸 고려하면서 나도 잘 몰랐던, 서부 아프리카인들이 잘 몰랐던 또 다른 아프리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영화가 두 아프리카 사이의 통로와 교각의 의미가 되기를 기대한다.

- <키니와 아담스>에서 도시를 동경하던 두 남자가 결국 관계의 파국을 맞는데 이는 결국 자본주의와 물질 때문인데, 이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무엇인가? 아프리카를 잠식해가는 자본주의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무엇인가?

자본주의가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들, 예컨대 의료나 교육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소수의 몇몇에 의해 자본의 투기화가 진행돼가고 있다. 이것이 전 지구를 미친 자본주의로 몰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을 '야만적 자본주의'라 부른다. 아프리카가 가난한 건 사실이지만 의료나 가난, 빈곤 등의 문제는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유한 나라에도 그 내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가?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래적으로 추구하려던 것들, 예컨대 사랑이나 연대 같은 것을 언젠가는 다시 찾으려고 들 거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될 순간이 오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때엔 굶어죽나 아파서 죽나 총 맞아 죽나 어차피 상관없는 때가 되기 때문에 결국 반란이나 혁명까지도 일어나게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아프리카가 됐건 어디가 됐든 똑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이 미친 자본주의는 어떤 방식으로든 조절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하게 될 것이다.

- <키니와 아담스>에서 두 사람의 우정 관계에서는 아담스가 키니를 동경하고 질투하는 것뿐 아니라 동성애적인 집착도 보이는 듯하다. 감독의 의도인가?

동성애적인 사랑을 의도한 건 아니다. 우정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건 플라토닉한 정신적인 사랑이다. 아담스는 떠나려 하지만 결국 떠날 수 없게 되자 자살하고 만다. 우정이 너무 강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 당신은 어떤 감독들을 좋아하며 누구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는가?

너무 많아서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오손 웰즈, 빔 벤더스 등을 들 수 있겠다.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영화이다. 스필버그의 <칼라 퍼플>도 무척 좋아한다. 사실 나는 휴머니티나 사랑, 즐거움 등 인간에 대한 얘기를 하는 영화들을 두루 좋아한다. 때문에 어떤 특정한 영화를 꼽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2009/10/01 08:03 2009/10/01 08:03

내 생애 첫 단독인터뷰의 대상은 신동일 감독이었지만, 실은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개봉할 당시 김응수 감독이 나의 첫 인터뷰이가 될 뻔했다. 인터뷰 때문에 김응수 감독을 만나러 가던 길에 자그마한 소동을 겪었고, 그 때문에 약속을 취소했다가 나중에야 다시 만났다. 사람 만나는 것도, 인터뷰란 작업 자체도 무서워서 망설이고 있던 당시, 언론시사로 본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여러 모로 충격적이었다. 시사가 끝난 뒤 몇 명 남지 않은 기자간담회에서 처음으로 질문을 했었고, 그걸로 성에 차지 않아 비로소 인터뷰라는 걸 해볼 욕심이 생겼다. 영화를 이미 봤음에도, 영화사로부터 스크리너를 받아 다시 한 번 꼼꼼이 보며 인터뷰 질문들을 정리했던 게 기억난다.

기사가 나간 뒤, '길고 재미없다'고 데스크에 또 혼이 났다. 사실 이것도 많이 줄이고 잘라낸 것인데. 하지만 그 이상 그의 말을 잘라내고 싶지 않았다. 감독이 자신의 의지를 매우 또렷하게 영화에 반영했다면, 그리고 그 의지를 인터뷰를 하러 갔다면, 되도록 그의 말을 충실히 싣는 게 좋지 않은가. 많이 배웠던 인터뷰였다.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하고싶고 지향하는 인터뷰란 게, 결국은 이런 식인 것 같다. 일간지 포맷에는 다소 맞지 않는, 인터넷 매체에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길고 지루한. 이 기사는 프레시안의 이 페이지(새 창으로 열기)에 실렸던 것이다.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죽음을 기리는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기존의 추모 다큐멘터리의 형식 대신 인터뷰만으로 일관하는, 형식의 파괴가 돋보이는 다큐멘터리다. 그들이 죽고 22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망각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고자 치열한 노력을 카메라에 담으며 '망각에 대한 투쟁'을 펼친 김응수 감독을 프레시안이 만났다.

- 김세진 이재호 기념사업회에서 영화를 제작했는데 주변의 반응은 어떤가?

기존에 역사를 바라보며 추모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하다못해 영정이나 추모식 사진 같은 것도 나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를 내 의도대로 봐주는 사람들도 많다. 과거를 기억하고 망각에 대한 투쟁을 벌이는 게 이 영화의 주가 되는데 사실 그런 식의 구체적인 비주얼을 삽입해 버리면 힘이 빠지지 않는가. 투쟁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 같고, 겨우 저걸 기억하려고 힘들게 저럴까 싶을 거다. 기억이 어떤 식으로 남아있든, 단편적이든 사실과 조금 다르든 시점이 어긋나든,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망각 속에서 기억 속으로 복원시켜야 한다는 걸 다룬 영화니까. 전형적인 추모 다큐멘터리처럼 몇월 몇일에 태어나 어디에서 살았고 학교는 어땠으며... 이런 식의 방식을 취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이고 힘이다.

 - 사실 그런 식으로 구성하면 김세진, 이재호 씨가 영웅으로 신비화되긴 한다.

그것도 우려가 됐다. 영화에서 나는 '열사'라는 표현을 절대 쓰지 않았고, '분신' 대신 그냥 '죽음'이라고만 표현했다. 각자가 그들의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판단하고 정리하는 거지 한 집단이 의미를 규정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 가치를 강요해선 안 된다. 그들은 물론 엄청난 일을 하긴 했지만 그 이전에 우리와 함께 살던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다. 여자친구도 있고 데이트도 했고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과 얘기할 때 나는 그들을 세진이 형, 재호 형이라고 호칭한다. 그런 삶의 호흡 속에서 그들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그게 우리는 왜 불가능할까, 의문이기도 했고.

추모비 뒤에 고은 시인의 추모시가 있다. 아주 시적인 표현들인데 난 그것도 보기가 힘들고 부담스럽다. 그거야말로 한순간의 느낌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상화시켜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 그런데 예전에 한 친구한테 그런 얘기를 하자 그 친구가 그러면 문제가 생길 거라고 하더라. 안에서 서로 간 싸움도 생길 거고 밖에선 또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하기 쉽다고. 우리의 마음이 어떻고의 차원이 아니라, 이게 사회의 역관계 속에 있고 현재진행형인 만큼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라. 그 말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과거와의 투쟁 아닌가. 대략적으로 역사가 정리가 되지 않고 여전히 혼란한 상태여서 그렇다.

- 20대들은 주로 낯설고 불편하다고 반응하는 듯하다.

낯설다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가고, 불편하다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반응 같다. 편하게 볼 영화라면 박물관에서 흔히 전시물 틀어놓은 거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거다. 그저 수동적으로 별 고민 없이 그냥 보고 받아들이고 곧 잊어버리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서적 작용이 있었다면 그건 좋은 거지. 지난번에 이 영화를 봤다는 어떤 20대 여성은 그냥 멍했다고 반응을 보내왔더라. 20대인 자신에게 역사는 뭔지 과거는 뭔지, 선배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 멍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 그런 반응도 나쁘지 않은 듯하다. 액션이 있다는 거니까.

- 영화의 총예산은 어떻게 되나?

김세진 이재호 기념사업회에서 5천 5백만원,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서 받은 지원금 1천 4백만원, 해서 총 7천만원 정도로 찍었다. 기획서에서 어떤 영화를 찍을 것인지 자세히 밝혔는데, 김세진 이재호가 죽었을 때만도 반미는 사형을 각오하고서 외치는 거였지만 이제는 국가의 단체에서 자금을 지원해주다니 세상 참 많이 변했구나 느꼈다.

- 총 제작에 걸린 시간은?

1년 6개월이다. 제작 의뢰를 받고 고민한 기간만 4, 5개월 된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것인가, 어떤 형식으로 영화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다. 기존의 80년대를 다룬 추모 다큐멘터리 형태로 가는 건 내가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기록물이 전혀 없어서 가능하지도 않았다. 80년대 전반에 관한 기록은 있어도 그들의 죽음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 다큐멘터리를 처음 하다 보니 다른 다큐멘터리를 보면 공부를 했는데, 유태인 학살을 다룬 <쇼아>에서 큰 힌트를 얻었다. <쇼아>를 보면서 증언과 인터뷰만으로도 보는 사람들이 그 형상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쇼아>를 보면 가스실이나 수용소에 대한 공포가 직접 그 건물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드러난다. 관객에게 수동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그 이미지를 스스로 머릿속에 쌓아올리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건의 경우 3일 내내 그들과 같이 있으면서 그 과정 모두를 목격한 사람은 없다. 누구는 한 시간 동안 만났고 누구는 직후에 봤고... 이걸 조합해 보자 생각했다. 사람마다 그들을 목격하거나 함께한 시간과 공간은 다 다르지만 그걸 모으다 보면 맞춰지겠지 생각했다. 다행히 성공적이었던 건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 윤곽을 잡아내더란 점이다. 3일의 기간 동안 누구는 어디에 앉아있고 누구는 옥상에 올라가고, 일관적인 흐름이 있는 그림이 잡혔다. 그것만으로 성공했다 생각했다. 형상을 그려냈으니까. 그렇다면 굳이 사진이 없더라도 이것으로 기록이 되지 않겠는가.

찍는 과정에서는 인터뷰이를 섭외하는 과정이 오래 걸렸다. 못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솔직히 누가 그걸 다시 대면하고 싶겠는가. 섭외가 됐다 해도 막상 찍으려고 하니 시간을 맞추는 것도 어렵더라. 모두들 각자 생활인이다 보니 일요일밖에 시간이 안 되는데 주말마다 개인적인 사정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렇게 촬영을 드문드문 하느라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찍고 나서 후반작업도 공들여서 했다.

김응수 감독

"다큐멘터리는 단순한 '사실'이 아닌 '진실'을 담아야 하며, 그 진실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제공 _ KT&G 상상마당)

- 인터뷰이 중에 이정승 씨는 이전에 한겨레21에도 증언을 하신 적이 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이전에 공식적인 증언을 했던 사람은 이정승 선배뿐인 것 같다. 인문대 학생회장이라는 공식적 활동을 했던 사람이고 김세진 형과 친구처럼 지낸 사이니까. 도의적으로 친구의 기억을 위해 자신이 안 하면 안 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영화에 싣지 못한 에피소드들도 많다. 여자친구 얘기도 그렇고. 아버님도 그 여자친구를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가능한 일이 아니기도 하고. 그러나 영화가 긴 기간에 걸쳐 들쭉날쭉하면 내가 감당을 못 하니까, 결국 3일간 팩트 중심의 이야기로 좁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 증언을 하신 분 중 녹취를 하신 분은 왜 목소리만 제공하신 건가? 얼굴 공개를 거부한 건가?

그런 건 아니다. 그 사람은 원래는 인터뷰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자료 수집 와중에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만년필과 안경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그 사람이 듣고 있다가 자신이 만년필과 안경이 챙겼다는 얘기를 하는 거다. 알고 보니 그가 분신 때 옥상에 올라갔던 사람이었다. 인터뷰 대상으로 결정했던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얼굴을 보여주려고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가장 적당한 건 녹취구나 판단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녹취를 땄다. 녹취를 듣고 보니 상황이 얼추 아귀도 맞고. 다만 그 사람은 용우한테 줬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재식에게 받았다고 하고, 그 사이에 간격이 좀 차이가 난다. 아마도 그 사람이 용우에게 주고 용우가 재식에게 준 것 같다.

어쨌든 전날 의대(연건동 서울대 의대)가지 갔다가 학교(신림동 본교)에 돌아와서 하룻밤 자고 신림사거리에 가서, 옥상 밑에 있다가 옥상에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고 안경과 만년필을 주고... 3일의 사건을 하나로 관통하는 인물이다. 옥상에 올라간 사람은 그 사람 하나니까, 그 사람의 녹취를 영화 전체의 중심으로 놓고 다른 인터뷰들을 맥락이 비슷한 위치에 배치했다. 예를 들면 여자애들이 울고 있는데 사회학과 아이였던 것 같다는 증언 뒤에 여자의 인터뷰를 넣었고. 꼭 그 사람은 아니지만 대략의 연관성을 가지도록 구성을 했다.

- 인터뷰에서 굳이 정면샷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카메라가 바라보는 관객이고 세상이라 한다면, 인터뷰이들이 이를 정면으로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사람을 참 힘들게 하는 게 사실이다. 보통의 다큐멘터리들은 인터뷰이가 편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눈을 보지 않은 채 그냥 옆에서 찍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일부러 카메라를 완전 정면으로 향하도록 했다. 인터뷰어인 나와 그들이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이자, 그들과 관객, 그들과 세상이 서로 정면 대면하는 것이다. 그럴 때 관객에게 보이는 그 사람의 얼굴, 그 얼굴이 말해주는 것들, 이런 걸 찍기를 원했다.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해야 인터뷰가 단순하면서도 힘이 느껴질 거라 생각했다.

- 얘기가 진행될수록 카메라가 인터뷰이에게 접근하여 얼굴 클로즈업으로 간다. 이것 역시 의도된 것인가?

그렇다. 설정한 것이다. 찍기 전에 대강 이런 얘기를 이런 흐름으로 갈 것이라고 의논을 했고, 카메라를 찍는 사람은 이를 숙지하고 있었다. 이건 사실 '감'이다. 이런 얘기 즈음에서 앞으로 가고, 다시 앞으로 가고. 물론 편집에서 달라질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의 감을 가지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계속 밀착해 들어가는 거다.

- 그런데 이정승 씨 인터뷰 때만 유일하게 카메라가 픽스된 채 이동이 없다.

그건 의도라기보다는 인터뷰가 너무 짧았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정신없이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서인데 듣고 보니 이상하긴 하다. 이정승 씨가 얘기한 부분이 일종의 클라이막스인데, 오히려 그 부분이 객관적으로 찍힌 것 같다. 카메라맨이 놓친 것이거나 편집에서 잘린 걸 수도 있겠다.

- 이재호 아버님의 인터뷰가 끝난 후 갑자기 크레딧이 삽입되면서 이를 계기로 영화가 둘로 나뉘는 느낌이다.

아버님이 나오고 비오는 대문이 보이는 것이 관객에게 감정이입을 너무 강요하는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자막을 넣었다. 감정을 기대하지 말라, 당신이 감동한다거나 슬퍼한다고 해서 이게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라는 게 내 의도니까. 이 영화가 그렇게 감동적이거나 몰입시켜서 눈물을 짜게 만드는 영화는 아니지 않는가. 영화라는 걸 상기시켜 주면서 분위기를 깨줄 필요가 있었다. 또한 2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도 있었다. 영화를 딱히 2부로 나눈 건 아니지만 그 뒤부터 영화가 새로운 방향으로 가지 않는가. 공간도 하늘이나 바다로 가버린달지. 그래서 필요한 것 같았다.

- 서울대 내에서의 인터뷰가 이어지다가 밖으로 나가는 것도 그 중간자막으로 구분이 되는 건가?

그렇다. 계속 학교 내부에서 찍은 후 아버님을 찍고 아버님 뒷모습이 나온 뒤 대문이 나오지 않는가. 그러면서 바깥으로 나가는 거다. 계속 안에 있다가 바깥을 향해 나가는 느낌인 거지. 그래서 변산으로 간 거고. 다큐멘터리에서 굳이 그런 식으로 외부 공간을 선택하는 건 사실 드문 일이다. 대개는 그냥 일반 삶 속에서 찍지. 이건 꽤 모험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뭔가 구름 속에서 형상을 찾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안개 속의 풍경 같기도 하고. 바다도 쨍한 바다가 아니라 안개가 낀 것 같이 안개가 피어오르고 멀리 뒤로 섬도 보이고 등대도 있고... 게다가 어쩐지 물에 그렇게 집착이 가더라. 비도 그렇고. 물로 뜨거운 걸 꺼주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하늘이 주는 허허롭고 공허한 허공의 이미지, 그리고 뜨거운 걸 꺼야 할 것 같은 물의 느낌 같은 걸 살리고 싶었다. 그건 만드는 사람의 마음인 거고 영화에서 중요한 상징이나 의미인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상징을 찾더라.

- 폐쇄적인 상아탑의 공간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도 맞는 느낌일 수 있는데, 그건 보는 사람의 주관에 달린 문제인 것같다. 내가 나름 설정한 마음의 흐름이 있다고 해서 보는 사람에게 그렇게 보라고 강요할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는 당신처럼 볼 수 있고 누군가는 물의 이미지가 불의 이미지와 부딪히면서 강렬한 걸 느꼈다고 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멍하니 보면서 구체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파도소리가 총소리처럼 들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

- 나 역시 마지막 파도소리를 총성인 듯 들었다. 의도한 것인 줄 알았는데.

연상을 하게 하는 건 사운드든 공간이든 다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연상은 각자 자기 경험 속에서 자기 주관성과 만나는 것이다. 대체로 20대들은 당신처럼 느끼지 않는다. 안개 속의 풍경처럼 잘 모르겠는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파도소리는 총소리보다는 물이 딱딱한 바위를 부서져라 치면서 깨려는 듯한 느낌을 의도한 거다. 사운드 믹싱을 하는 엔지니어에게도 무조건 세게 넣어달라고 했다.

- 마지막으로 감독이 인터뷰이가 되는데, 감독이 카메라 뒤에서 굳이 앞으로 나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영화가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망각에 대한 투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카메라 앞에 불러내 투쟁을 시키고 있으면서 정작 나는 그들 앞에서 심문관으로 서 있다. 과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심문관 역할을 하는가? 그들은 나에게 왜 당해야 하는가? 그건 윤리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내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세의 문제이기도 한 거다. 나도 같이 당해야 한다. 내 인터뷰 장면 때문에 다른 인터뷰이들도 다 수긍을 하고 영화가 끝났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다들 나중에 자기 거는 빼달라고 했을 거다. 할 때야 큰 생각 없이 하는데 찍힌 거 보면 쑥스러울 테니까. 그런데 내 인터뷰 장면을 보고 말들이 없더라고. 그래서 영화가 정리가 된 거다.

- 영화라는 게 감독의 것인 것만큼 그 목소리를 감독의 시선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아니, 내가 통합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심문관의 자격이 있는가? 라는 소박한 생각으로 참여했을 뿐이다.

- 3일에 집중하겠다고 했는데 감독이 증언한 인터뷰에서만 짐을 들어주겠다고 나섰다가 나중에 군대에 끌려간 다른 사람 얘기가 끼어든다.

그것도 3일에 관련된 얘기다. 김세진, 이재호가 주도한 의대 점거농성 투쟁과 관련된 얘기니까. 오히려 그 전에 3월 18일 반전반핵 평화투위가 뜨던 날 이재호를 만난 얘기, 그리고 학생회비 걷어서 김세진 선배를 찾아간 얘기가 3일과 관련없는 얘기이다. 이건 일부러 넣었다. 두 사람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이 너무 없기에 형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난 두 사람을 원래 알았던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까 이후에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 기억이 난 거다. 자연대 학생회실에 갔다가 김세진을 만났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그때도 이상하게는 느꼈다. 이 사람이 학생회장이라고? 머리도 길고 미소년 타입에 예쁘게 생긴 데다 딱 부잣집 아들 티가 났다. 이재호 선배는 계속 몸을 부들부들 떨었던 게 기억난다. 그땐 반미 얘기는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얘기였으니까. 난 주체가 아니었으니 그런 절대절명의 기분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면 그 날 시위도 좀 달랐다. 예상되지 않은 상황에서 반전반핵 외치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에너지가 달랐고 목소리도 똘똘 뭉쳐 있었으며 불안과 함성 같은 게 다른 때와 차원이 달랐다. 그 느낌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구호 자체가, 참여 자체가 공포스러웠기에 집회도 오래 할 수 없었는데, 도서관 통로 지나갈 때 구호 때문에 통로가 막 울렸던 것도 기억나고.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사형을 각오하고 외친 반미 구호였으니 이 중에 누구는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던 게 기억날 정도다.

- 오늘날에 외치는 반미 구호는 그 의미가 어떻게 다를까?

그때 문제제기가 됐기에 오늘날 우리가 미국이 옳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평화협정 문제도 초보적이긴 하지만 얘기가 오갔고. 그때는 그런 식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휴전협정의 주체가 미국과 북한인데 주체가 빠지면 누가 얘길 하나? 논의 주체에 3자, 미국이 있다는 게 그 사건으로 분명해진 거지. 남한-북한, 북한-미국, 남한-미국 간 얘기가 따로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아직도 미국과의 관계 문제가 북한 문제가 항상 가운데에 있으니까 여러 가지로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걸 영화에서 얘기할 순 없었고... 모든 문제가 같이 풀려야겠지. 통일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기타 등등. 북한 문제가 풀려야 우리 문제도 풀리는 것 아닌가.

- <과거는 낯선 나라다>의 가치에 대해 특히 영화미학적 측면에서 어떻게 자평하는가?

인터뷰라는 건 단순히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사람의 현재의 존재 자체를 찍는 것이다. 얼굴에 드러나는 현재의 상태,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감정까지 찍어야 인터뷰의 힘이 발휘된다. 이걸 보여줬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는데, 이건 이제까지의 인터뷰가 잘못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의 힘에 대해 하나의 지점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80년대에는 폭로나 고발이 다큐메터리가 가진 힘으로 여겨졌다. 탄압의 시대였으니까. 90년대는 주로 회고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이제 이런 게 너무 많아졌고 사람들도 많이 지쳐버렸다.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한번 얘기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얼마나 많았나? 그렇다면 2000년대엔 어떻게 역사를 복원하고 기억할 것인가?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키고 현재 속으로 과거를 불러와야 한다. 과거가 저기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있는 현재의 공기 안에 같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내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제기했다고 본다.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역사를 다루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더 이상 회고하지 말고 신비화하지도 말자는 거다. 우리의 현재에 과거가 어떻게 남아있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보듬어 가자고 문제제기를 한 게 이 다큐멘터리가 가진 가장 큰 의의라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더라. 물론 이것은 내 의도이기도 하다.

- 이재호 아버님의 장면에서, 찍을 때 대답을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대답을 못 하셨던 장면을 넣은 건 다큐멘터리의 윤리성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가? 연출자가 지나치게 개입해서 조작한 것은 아닌가?

나는 진실의 문제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버님이나 어머님은 이미 학습화된, 준비해놓은 대답을 하셨고 그건 진실의 대답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갖고 계시고 아들이 죽었으니 이렇게 얘기해야 부모의 도리겠지 싶은 것들, 아들 친구가 왔는데 뭐라도 대접해줘야겠다는 마음, 동네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 같은 걸 고려해 생각해놓은 답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진실일까? 할 얘기가 없으면 안 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찍었다. 조감독에게도 어떤 게 진실이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조감독 역시 대답을 못 하셨을 때가 진실이라고 하더라. 사실 예민한 문제가 아닌가? 아들 친구들에 대한 솔직한 마음보다는 그저 다들 행복하고 잘 살기 바란다는 예의상의 말씀을 하시기 마련이다. 말하고 행동하는 걸 그대로 찍는 건 사실을 찍는 거지만,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아닌 것들은 들어보면 생명력이 없기 마련이다. 이건 아니다. 사실과 진실을 혼동하면 안 된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이 아닌 진실을 찍는 거라 생각한다.

- 관객은 그 장면에서 강한 정서적 울림을 받게 된다. 장면을 두고 선택을 한다는 건 감정의 조작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어떤 장면을 넣을 것인가는 내 선택이고, 그런 식으로 보면 영화의 모든 장면이 다 선택의 영역이다. 한 시간 인터뷰해서 모든 걸 다 집어넣을 수 없으며, 그 중 일부분을 내가 선택하는 것 아닌가. 무얼 말하고 행동하는가, 그 사실의 영역을 찍은 후 그 사실 덩어리 속에서 어떤 걸 취할 것인가, 이 사람의 말 중 어느 것이 사실의 진수인가를 선택하는 건 감독인 내 몫이다. 세진 형의 부모님도 증언을 하셨었고, 병원에서의 상황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 증언 역시 사실이고 본인들도 우실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들도 울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것을 고려하면 그 장면들은 아깝더라도 버릴 수밖에 없다. 그런 게 바로 진실이다. 어쩔 수 없는 거다, 선택을 해야 하니까.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찍는 거라 얘기하지만 사실을 얘기해서 과연 뭘 할 건데? 그 뒤에 있는 진실을 봐야 하지 않나? 그런 식으로 보면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사실에서 어긋난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각각의 증언에서 아귀가 서로 안 맞는 부분들도 있지 않는가? 누구는 8시라 하고 누구는 9시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인위적으로 맞추지 않고 그냥 그대로 넣었다. 그렇게 기억하는 것 자체가 진실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차원에서의 그런 소소한 어긋남은 핵심이 아니다.

-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여기는 건가?

우리나라에서 이제껏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들의 함정이기도 하다. 그냥 그렇게 찍는 것. 그 많은 에피소드나 사실 중 내가 보는 진실은 뭔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냥 쭈욱 사실을 찍는답시고 찍는다. 자신의 진실의 관점대로 장면을 선택하고 그걸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거다. 사실만 나열한다면 받을 비판도 없겠지.

- 결국 카메라를 잡은 사람이 보는 진실이란 얘기인가?

그렇다. 각자가 보는 진실인 셈이다. 저것은 거짓이고 저것은 참이다라는 걸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같은 소재에 대해 찍는다면 다른 진실이 나올 것이다. 역사는 완전히 절대적으로 객관화될 수는 없다. 세상을, 사건을 바라볼 때 확실히 진실을 바라보는 다양한 단면들이 합쳐져야 그것이 전체가 된다. 다양하고 다른, 상반된 관점들이 여럿이 있어야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는 거다.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 아닌가? 광주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들면 광주 영화도 다를 거다. 다 뒤집을지도 모르지.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네마네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 관점을 제시하며 이렇게 했다, 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화려한 휴가>는 과연 누구의 관점으로 만든 영화인가? 누군가에겐 광주의 정신에 근접도 못한 채 권력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라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의 근현대사도 마찬가지고 민주화 운동도 지금 누구의 관점대로 서술된 것인가? 민청학련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죄 같은 건 과연 누구의 어떤 관점으로 정리돼 버렸을까? 다른 사람 눈엔 전혀 어이가 없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간 내가 보는 관점은 그렇다. 어떤 사람들에겐 90년대에 일반화돼 있던 광주 다큐멘터리 같은 게 객관적인 거라 여겨지겠지. 아무 비판도 있을 수 없는, 그냥 짜깁기된 화면들 말이다. 과거에 이랬고 이런 사건이 이랬고 우린 지금 민주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식의. 과연 그게 지금도 유효할까? 그런 건 객관적인 게 아니라 아예 시점이 없는 것이다.

- 다음 작품으로 어떤 영화를 구상중인가?

시각장애인과 카메라와의 관계를 다룰 예정이다. 극영화를 하면서는 그런 고민을 많이 하지 못했는데,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만들면서 찍는 카메라와 찍히는 대상에 대한 상호관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카메라가 내가 가진 눈이 되는 것 같고, 인터뷰이와 세상을 연결하는 창 같기도 하더라. 그런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시각장애인을 등장하는 영화들은 의례 항상 지팡이를 들고 불쌍한 모습으로 훌쩍대다 우리도 인간답게 살고싶다고 한탄하고, 그러면 사람들은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며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이라며 추켜세우는 식의 영화들이다. 왜 이렇게 비장애인의 시선으로만 봐야 하나. 그들도 엄연히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데. 나름대로 즐겁게 살고 있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사랑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죽네사네 하면서 산다. 그리고 이미 시각을 잃어버렸는데 그냥 그 안에서 살아야지 자꾸 완전한 세계가 여기 있고 당신들은 불완전하다는 식으로 보는 게 무슨 도움이 되나. 우리야 그 사람들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시스템을 만들면 되는 것뿐인데, 그걸 못 하면서 동정만 하고 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발언하는지 찍고 싶다.

내가 카메라로 찍을 때 이 사람들 역시 정면으로 응시하며 찍을 수 있을까? 못 찍을 거다. 그건 폭력이 된다.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찍는다 해도 이미 그건 우리의 고착화된 시선이다. 동정과 연민을 느끼며 찍게 된다. 그들의 눈 자체가 이상하고 불완전하다 생각하며 어색해하는 거다. 그렇기에 내가 이번에 만드려는 영화는 그들을 존중하며 어떻게 찍을 수 있을지, 이들은 어떻게 어떤 감각으로 세상을 볼지를 탐구하는 영화다.

- 영화는 시각에 많이 의존하는 매체인데 시각장애인의 이야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찍기가 힘들다. 처음엔 이 시각장애인이 보는 걸 카메라가 찍을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못 찍을 거라는 게 지금의 내 결론이다. 문제해결 지점을 찾는 게 아니라 그가 보는 걸 내가 찍지 못한다는 것을 상호간에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 역시 '나는 본다'고 표현하며 경계를 넘으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보지 못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겠지. 경계 내에서 그냥 인정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영화란 생각을 지금은 한다. 경계를 넘어서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인정하는 거다. 넘어선다는 건 힘든 욕망 아닌가. 하지만 경계를 정리한다는 건 그만의 성찰이고 성장이다. 그러니까 이건 다큐멘터리보단 극영화에 더 어울린다. 경계를 인정하고 그저 자신 안에서 살 뿐이라는 것, 카메라는 그 사람의 바깥에 있다는 것, 그걸 보여주는 영화가 될 것이다.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상호 그걸 인정하는 게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다큐멘터리를 다시 찍고 싶은 생각은 없나? 꼭 만들어보고 싶은 다큐멘터리가 있다면?

찍고싶다고 자주 생각하지만 역시 펀딩의 문제 아니겠는가. 예전엔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는 게 편했는데 요새는 아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젊었을 땐 사회적 문제에 관심 많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적인 문제나 철학, 실존의 문제에 천착하게 되는데 나는 반대다. 내 영화를 봐도 알겠지만 오히려 확장되고 넓어진다.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싶다. 거기에 영화의 힘이 있다. 개인에 파묻혀 있어 거기에 대단한 게 있는 듯 치장하는 것, 사회를 보는 건 촌스러운 거라는 식의 생각이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말 하고 싶은 다큐멘터리가 있다면 역시 광주다. 총체적 시선으로 광주항쟁을 정리하고 완벽하게 재현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그러던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부족함이 많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시점으로 기록이 남는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완벽하게 다루는 건 하느님만 하는 거지. 나는 나의 진실이 담긴 광주를 그리고 싶다. 누군가는 그의 진실대로 또 다른 광주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 그런 게 쌓이면 사람들이 이것저것 보면서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겠지. 물론 이상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누구 한 사람이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단 하면 될 텐데 왜들 안 할까? 나보다 돈있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하면 좋을 텐데.

- 섣불리 건드리기 힘든 상처라서 그런 것 아닐까?

그거야말로 오만 아닐까. 자신을 낮추면 된다. 자신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이 시대에 호흡하고 있기 때문에 쟈신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과 영역 속에서 하면 되는 거다. 뭘 두려워하나? 각자는 그냥 한 인간일 뿐인데 뭘 다 정리를 하나? 투쟁도 자기가 호흡하는 인간으로서 하는 거지, 자기로 인해 세상이 변하고 뭐 대단한 걸 이루고 그런 걸 기대하면 안 된다.

- 기록이란 게 한번 남으면 계속 남는 건데, 그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대한 노력하면 되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리서치 하고 사람을 만나보고 어떤 시점이 좋을지 고민하고, 이게 정수다 생각되면 밀고 나가면 되고. 그럼 누구는 너무 투쟁적이다, 너무 시적이다 욕하려나.

-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예전엔 거장 감독들의 후기작들을 좋아했다. 미장센이 잘 돼 있고 형식적으로 잘 짜여져 있는 영화들, 예를 들면 파졸리니의 후기작, 피터 그리너웨이의 장중한 영국식 작품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란>과 같은 후기작들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요즘엔 초기작들과 다큐멘터리들이 좋아진다. 그 안에서 진실들이 느껴지는 영화들 말이다.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다. 멋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어떻게 접근하느냐, 진실을 어떻게 담을 것이냐가 더욱 중요해진다.

또한 요즘 내 고민은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것이다. '나는 본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대체 내게 카메라는 뭔가. 예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 했던 장-뤽 고다르의 영화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요즘엔 마음에 와닿는다. 그의 영화들 보면 유럽의 실존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뒤로 가면서 굉장히 넓어진다. <아워 뮤직> 같은 영화를 보라. 사회, 인류, 이런 거에 대해 너무나 고집스럽고 맑은 느낌이 느껴진다. 저 사람은 저렇게 안 해도 사적으로 멋을 부릴 수 있고 더 멋지게 나갈 수 있는데 왜 저렇게 투박스럽게 자꾸 고민할까, 나이가 들었는데도 투쟁의 끈을 놓지 않는구나, 그런 부분들에서 감동을 느낀다. 영화 매체의 실험도 계속하면서 주제나 소재 면에서 자기가 무엇을 다뤄야 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주제넘은 말이지만, 나도 한 측면으로는 화가가 그림 그리듯 이미지라는 게 뭘까 뭘 재현할까, 카메라는 뭘까, 이런 문제가 많이 고민되고, 주제 면에서는 좀 더 예전보다 넓어지고 있구나 여겨진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자신이 생겨서 그런 건 아니고,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인가보다. 예전엔 남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남이 요구하는 대로 가야 성공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나이 들면서 그런 데에서 많이 자유로워진 듯하다. 이런 변화, 스스로 마음에 든다.

2009/09/28 12:41 2009/09/28 12:41

2008년 3월이니 벌써 일 년 반 전이다. 내 생애 처음으로, 신동일 감독을 만나 단독 인터뷰란 걸 했다. 그간 누군가의 인터뷰에 따라가거나 한 적은 있었어도, 내가 내 이름을 걸고 혼자 인터뷰를 해서 기사를 쓴 건 처음이다. 무척 많이 떨렸고 긴장했다. 인터뷰는 두 시간이 넘게 진행됐고, 그걸 풀어서 기사로 쓰는 데만도 몇 일이 걸렸다. 그나마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1/3 가량이 잘렸다. 제목도 내가 아닌 데스크에서 붙인 것. 당시 신동일 감독은 두 번째 영화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만들어놓고 1년이 지나도록 개봉 날짜를 못 잡고 있었다. 우연히 모니터링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후 만나서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반 년도 더 지나서야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잠깐 극장에 걸리는 둥 마는 둥한 모습으로 개봉했다. 그리고 신동일 감독은 세 번째 영화 <반두비>를 내놓았다. 약간 다른 이유, 좀 슬픈 이유로 화제작이 됐지만 흥행에선 여전히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만든 영화 세 편이 모두 우여곡절을 겪었고 고난의 시간은 길었다. 그러나 나는 이 고난들이 감독에게 오히려 큰 자산이 될 거라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그 사이 신동일 감독은 스스로 '독립영화 감독'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갖고 사회적 사안들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그가 차기 한국영화가 가장 주목해야 할 감독 중 하나라고 믿는다.

이 기사가 실린 프레시안 페이지는 여기다.


 2005년 첫 데뷔작 <방문자>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뒤 영화계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던 신동일 감독은 2006년 두 번째 영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내놓았다. 이 영화는 2006년에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돼 극찬을 받았고 크고작은 해외 영화제에 연달아 초청됐다. 그러나 <방문자>는 관객들의 자발적인 DVD 출시 청원운동이 벌어졌음에도 아직까지 출시되지 못했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개봉날짜를 잡지 못한 채 1년이 넘도록 표류하고 있다.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잃어버린 1년'이 지나고도 구체적인 개봉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 다만 지난 2월말 서울 시내 한 극장에서 한정된 관객들을 대상으로 모니터 시사회가 열렸을 뿐이다. 평단과 영화제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음에도 극장 개봉이 이토록 어렵고 DVD 출시조차 용이하지 않은 바로 이 현실이야말로 '한국영화 위기론'의 진정한 본질이 아닐까.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모니터 시사회장에 참석했던 프레시안이 신동일 감독을 따로 만나 비교적 긴 대화를 나눈 이유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어떤 영화?

명문대를 졸업하고 잘나가는 펀드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예준은 군대 시절 알게 된 재문과 그의 미용사 아내 지숙의 뒤를 봐주고 있다. 이들 부부는 예준의 도움을 받아 미국 취업이민을 준비하지만 재문이 삼촌에게 맡겨둔 이민비용을 날리게 되면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한편 지숙이 미용박람회 때문에 파리에 가 있는 동안 예준의 실수로 재문과 지숙의 갓난아이가 죽고 만다. 지숙에겐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모든 죄를 덮어쓴 재문은 아이의 죽음과 사체 유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옥살이를 하게 되고, 지숙은 예준의 후원 하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마침내 재문이 출소하고 지숙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이들의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향해 치닫게 된다. <헨젤과 그레텔>, <세븐 데이즈> 등에 출연해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준 박희순이 재문 역을, 최근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뉴하트>에 출연한 장현성이 예준 역을 맡았고, <메디컬 기방 영화관>으로 주목받은 홍소희가 지숙 역을 맡았다. 2006년 제작되어 그 해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고, 이후 홍콩영화제와 카를로비바리영화제 등 해외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됐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정식 개봉을 하지 못한 상태다.



- 영화 개봉이 왜 미뤄지고 있는가?
이 영화의 배급사인 프라임엔터테인먼트에서 작년에 투자 혹은 배급한 영화들 성적이 신통치가 않아서 내 작품을 비장의 무기로 너무 아끼는 것 같다.(웃음) 하지만 최근 <세븐 데이즈>와 <더 게임>의 성적이 괜찮았으니 상반기 개봉이 가능하지 않을까. 어쨌든 한국 영화계 사정이 그만큼 안좋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 이미 해외에서는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안다.
2006년 부산영화제 이후 홍콩영화제를 비롯해 체코 카를로비바리영화제, 미국 시애틀과 시카고, 호주 멜버른 영화제 등에 초청됐다. 프랑스에는 판권도 팔린 상태다. 하지만 프랑스보다 국내에서 먼저 개봉됐으면 좋겠다.

- 2006년에 개봉됐던 <방문자>의 경우엔 DVD 출시가 늦고 있다. 못 본 사람이 적지 않다.
일본에 수출돼 아마도 국내보다 일본에서 먼저 출시가 될 것 같은데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에선 판권을 갖고 있는 회사의 여러 사정들이 얽혀 있는 것 같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 관객보다 DVD로 볼 관객들이 더 많을 것 같기에 빨리 출시됐으면 하고 있지만 상황이 풀리지 않고 있다. 아마도 늦어도 5월 초에는 나오지 않을까 싶다.

- <방문자>처럼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저예산 비상업영화 계열의 작품인가.
꼭 그렇지 않다. 제작비를 굳이 밝힌다면 정확히 11억 2천만원이 들었다. 다른 상업영화의 1/3 수준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는 그만큼의 영화적 비주얼을 만들어 냈다고 자부한다. (내 영화로서는 드물게) CG까지 사용한 영화다. 어쨌든 <방문자>의 예산이 1억 3천이었는데,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10배로 오른 셈이다.

- 영화가 상당히 '386스럽다.' 주인공들이 386세대여서 그런가? 궁극적으로 386세대의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가?
영화속 주인공들은 사실 386이라기보다는 그 바로 다음 세대(X세대라 할지 N세대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에 해당하는 나이다. 하지만 굳이 386뿐 아니라 더 젊은 관객들, 그리고 결혼을 했거나 아이를 낳아본 부부 관객들 역시 이 영화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 영화속에 <철학에세이>같은 책을 굳이 보여준 것은 뭣때문인가?
이 작품을 구상한 게 97년말 IMF가 터진 직후 모티브를 얻은 것이고, 한국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던 그 때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더욱더 공공연하게 신자유주의화된 세상이지 않는가. 주인공 예준이가 예전에 운동권이었다는 사실이 키워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랬던 인물이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가치에 종속되는 상징성으로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묘사들은 전적으로 386들이 가지고 있던 정서와 특징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볼 관객들의 연령층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이 영화에 설정된 맥락을 그렇게 볼 관객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떠나 친구관계나 가족관계, 부부관계 부분을 유념해서 볼 관객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고, 다층적인 해석이 존재할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꼭 그런 틀로만 이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 당신은 영화들이 386 영화로 굳어지는 것을 경계하지만, 전작부터 이번 영화까지 모두 386 먹물 지식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대립구도가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감독이 계속 붙잡고 있는 주제인 셈인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길 나도 바란다. 내 자신도 386, 먹물이다 보니 내 나이 또래나 비슷한 세대의 디테일을 묘사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내가 천착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지금, 여기'에 관한 이야기다. <방문자>는 바로 현재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나치게 홀대받고 억눌리고 있는 상황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영화였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역시 예준보다는 재문과 지숙 커플, 즉 민초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고, 여기엔 나를 비롯한 지식인에 대한 자기비판의 성격이 담겨져 있다.

- 인물들마다에 계급성을 부각시켰다.
그렇다. 일단 예준은 그 가족을 위해 보상을 하는 방법이라고는 금전적인 것밖에 모르는 냉혈한이다. 예준이 건네준 통장에 과연 얼마가 들어있었는지는 감독인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지숙은 사정을 모른 채 예준이 준 돈을 기반으로 성공적인 비즈니스 우먼이 됐다. 미용실 계단에서 지숙과 공사하러 온 한국인 노동자, 이주노동자가 나란히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지숙이 과거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는 일종의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지숙이 한국인 인부나 이주노동자와 일종의 동질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주노동자의 경우 역을 맡은 배우가 이전에 연기 경험이 없는 분이라 결국 한 컷을 뺐기 때문에 약간 비약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약간 묘하면서 느낌이 있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 전작과 이번 작품 모두에서 칼 맑스가 언급된다. 칼 맑스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내 단편영화인 <신성가족>도 맑스와 엥겔스의 논문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대학 들어가고 나서 대부분이 그렇듯 광주 학살 등에 대해 알게 되면서 맑스를 접하게 됐는데, 맑스는 내가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된 데에 지적, 정서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워낙 매도도 많이 당하긴 했지만 아주 인간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아이가 둘이나 굶어죽는 등 비극적인 개인사를 갖고 있기에 존경심뿐 아니라 연민이 함께 있다. 얼마 전 영국에서 한 여론조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맑스가 꼽히기도 했지만, 맑스가 던졌던 문제의식은 요즘에 와서 더 유효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모두들 한물 갔다고, 철지난 이야기라고 얘기하지만 오히려 그 정신, 다르게 보는 시선은 여전히 필요하고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넣은 건 아닌데 하다보니 맑스에 대한 언급이 계속 들어간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나더러 빨갱이라 할 사람들도 있겠기에 조금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인터뷰에서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2018년에 <칼>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 200주년이니 의미가 있지 않을까. 국제적인 프로젝트로 해서 한 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때까지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이다. (웃음) 인물 감정이입이나 어떤 이익을 배제하고 일방적인 미화를 하기보다는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맑스의 인간적인 결함이나 희극성 같은 걸 다루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각각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 특별히 중점을 두었던 점들은 무엇인가.
영어로 표현을 해보자면 예준이가 changed, 즉 변질된 인물이라면 재문이는 not-changing한 인물, 즉 일관되고 우직하며 안전 지향적인 인물이고, 지숙이는 changing, 스스로 변화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런 식으로 범주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대사회의 정치와도 관련되지 않나. 재문은 현상유지파고 예준은 타락한 인물이라면 지숙은 이런 걸 깨려는 인물이다.

- 화면에 불러오는 인물은 과거의 인물이지만 사건이 벌어지는 건 현재이면서 항상 아이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미래가 함께 있다.
아무래도 에필로그에서 지숙이 임신하고 있는 장면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진정 인간다운 사회가 도래하는 건 우리 세대에는 불가능하다 해도 다음 세대에서는 이뤄야 한다는 염원을 갖고 있다. 나도 한때 80년대 후반 학번으로서 이상을 외치기도 했지만 그것이 불과 몇 년 새에 이루어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람시가 얘기했듯 "지성으로는 비관적이지만 의지로 낙관하는" 것이 중요하고, 바로 이것이 내 작품세계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한국 감독들 중에서 나만의 차별성이기도 하고.

- 굳이 아이가 죽는다는 설정을 넣은 이유는 뭔가?
그냥 그런 상상을 했다. 잔혹한 상상인 것도 사실이고 약간 변태적이라 할 수도 있고. 나도 우디 앨런처럼 일 주일에 한번씩 정신분석을 받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웃음) 97년말에서 98년에 그 작품을 처음 구상할 때 이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다 싶어 2, 3년 그냥 묵혔던 아이디어다. 언제나 현실이 가장 센 것이고 현실은 상상을 압도하는 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에 다시 그 아이디어를 꺼내면서 영화에 사용했다.

- 노골적인 출산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기술적으로 편집 등을 이용해서 컷을 나누거나 해서 속이지 않나. 그런 식으로 눈속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숙이 출산하는 장면이 있어야 이후에 드라마 전개나 인물의 심리 등이 설득력있게 다가올 거라 여겼다. 다소 비호감스러운 장면이긴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데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촬영하기도 힘들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지숙이 애를 잃고 나서야 아픔 등이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을 테니까. 이 영화가 상당히 관찰자적 시선을 갖고있기 때문에 일반 관객에게 불친절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데, 초현실적인 장면들도 있기는 하지만 출산 장면에서 사실적이었으면 했다. 실제로 내 딸이 태어났을 때 내가 직접 아이의 탯줄을 잘랐다. 출산 장면이나 목욕 장면, 모두 내 실제 경험에서 나온 디테일들이다. 솔직히 아내가 출산하는 순간 자궁을 직접 보진 못했다, 무서웠으니까.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찍어버렸다.

- 배우들의 연기에 어느 정도 만족을 하는가?
박희순의 경우 내가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의 거의 전부를 표현해 내더라.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내가 손쉽게 오케이를 할 수 있었고, 내가 다른 걸 주문하면 그걸 그대로 해보이는 매우 흡수력이 강한 배우였다. 홍소희는 연기 경험과 절대적인 인생 경험이 적은 신인이라 촬영하기 전부터 처음부터 많은 대화를 했는데 그럼에도 매우 헌신적으로 열심히 해주어 좋은 결과를 보여줬다. 개인적으로 <방문자>로 강지환을 발굴한 것처럼 <나의 친구, 그의 아내>로 홍소희를 발굴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장현성의 경우는 처음에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 연기 톤이 많이 달라 당황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하다보니 장현성의 연기가 예준을 훨씬 더 인간적인 결점이 있는, 더욱 인간적인 캐릭터로 만들더라. 결국 장현성이 만드는 예준에 내가 수긍하게 됐다.

- 무명 내지 조연이었던 강지환과 박희순, 장현성, 홍소희 모두 주연급으로 성장하고 유명해졌다. 배우 발굴에 비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비법이 있다기보다는,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나한테 그런 안목이 좀 있는 것 같다. 이창동 감독님도 송강호나 설경구, 문소리 같은 배우들을 발굴하지 않았는가. 나 역시 앞으로 적어도 주인공 중 한 명은 반드시 신인으로 가겠다는 원칙을 지키고 싶다. 스타배우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신인 중에 좋은 배우를 발굴하는 것 역시 감독인 나의 책임 내지 의무라 생각한다.

- 당신 영화는 규정하기 어렵다. 어떤 장르, 어떤 스타일의 영화인가?
<방문자>에 코미디적 요소가 있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는 스릴러 혹은 누아르적 요소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내가 그걸 풀어나가는 방식은 다 일상적인 드라마 형식이다. 인생 자체가 하루는 코미디 같기도 하고, 하루는 신파 드라마 같고 하루는 미스테리하지 않은가. 인생 자체가 장르를 벗어나는데 하나의 장르로 승부를 보는 건 좀 아니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것도 너무 경직된 사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번쯤은 장르영화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제 두 작품을 했으니 좀 더 다양하게 해보고 싶은 게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스케일이 크건 작건 내 작품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존중해줄 수 있는 든든한 제작자와 지속적인 파트너쉽을 맺는 것이다. 이안 감독이 그렇게 성장한 것도 데뷔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예산이 어떻게 되든 책임져주는 제임스 샤무스라는 프로듀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 그 이안 감독이야말로 대중에게 친절한 장르영화의 틀을 사용한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나도 장르에 대해 생각이 많은데... 다만 내가 장르영화를 만든다 해도 내 색깔은 충분히 묻어날 것 같다. "신동일은 어떤 장르를 만들든 고유의 색깔이 있고, 이슈 지향적인 소재를 다루더라도 캐릭터 중심적으로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나가는 재능이 있다."는 얘기를 다른 평론가가 해준 적이 있다. 나만의 전복적인 시선이나 특유의 꼬기 같은 걸 보장해 준다면 얼마든지 상업적인 장르영화를 만들어 볼 의향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 중 코엔형제는 장르를 잘 활용하면서도 장르를 뛰어넘고 장르의 법칙을 변형시킨다. 그런 식이라면 나 역시 장르영화를 해보고 싶다. 문제는 내게 제임스 샤무스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이지만.

- 요즘과 같은 시대에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참 본질적이라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글쎄? 영화는 나한테 애증의 대상이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학교 졸업하자마자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영화를 시작했는가 하면 영화 때문에 인생에 환멸을 느껴서 영화를 포기한 적도 있다. 애증의 대상이고 극복대상이자 위기의 대상이고, 내가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파고들고 싶은 존재다. 아직, 잘 모르겠다.

2009/09/24 22:38 2009/09/24 22:38

프레시안 관련기사 : 어렵고 힘들어? 그럼 십시일반 해야지! - 인디포럼이 채무변제 파티를 여는 이유(새 창으로 열기)

기자이면서 인디포럼 상임작가회의에 속해있어 저 기사를 쓰는 데에 좀 애를 먹었습니다. 기자의 양심이란 건, 대체로 자신이 설사 적극 지지하고 있는 대상이라 해도 어느 정도 거리를 취할 때 건사하기가 쉬우니까요. 그래서 웬만하면 어느 단체에 안 속해있는 게 좋은데... 여전히 고민중입니다. 그러나 제가 인디포럼 상임작가회의에 여전히 속해있는 이유는, 한편으로 다른 생각도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저의 양심을 걸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디포럼을 비판해야 할 때가 온다면, 그 누구보다도 매섭고 통렬하게 비판하겠다는 의지를 전제하는, 양심을 건 지지란 뜻입니다. 만약 제 양심과 위치가 충돌할 때가 온다면, 그땐 또 그때 가서 가장 현명하고 ‘옳은’ 판단과 실천을 해야겠지요.

인디포럼에서 채무변제 파티를 엽니다. 시절은 수상하고, 들려오는 소식들은 어이가 없거나 암울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잘 먹고 잘 자며 잘 놀고 잘 웃으며 힘을 내야 합니다. 말만 ‘초대’지, 실은 오셔서 돈 좀 쓰시란 자리입니다. 하지만 같은 만 원이라도, 좀더 보람차게 먹고 마시며 노는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인디포럼 채무편제 파티가 바로 그런 자리가 될 것입니다. 밑에 붙이는 웹자보를 참조하시고, 기왕이면 웹자보에 안내돼 있는 계좌로 미리 티켓값을 송금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살포시 제 블로그에 비밀댓글을 달아주시면, 파티장 당일 현장에서 티켓을 드리겠습니다. 이 티켓은 액면가 만 원 상당의 술과 안주를 드실 수 있는 티켓입니다. 오셔서 노바리를 찾으셔도 되고 N.을 찾으셔도 됩니다.

indieforumparty_re

2009/09/07 18:54 2009/09/07 18:54

Coco avant Chanel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보석과 옷으로 치장한 귀부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그녀는 남자 승마복을 개조한 바지정장에 납작하고 심플한 모자를 쓴 차림이다. 에티엔의 초대손님인 귀부인들이 대놓고 '미소년'이라고 부를 정도다. 파리 근교 시골에서 낮에는 재봉사로, 밤에는 싸구려 가수로 일하던 가브리엘 샤넬이 '성공'을 하겠다며 문을 두드린 곳은 자신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남작 에티엔의 대저택이었다. 정부라고는 하나 하녀들과 식사를 하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단기용 섹스상대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 뒤 그녀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용을 쓰는 모습이 너무 처절하고 눈물겹다. 소위 '잘난 남자에게 빌붙어 연명하는' 여자들에게 흔히 가질 법한 거부감, 나아가 경멸이 단번에 안쓰러움으로 바뀔 정도다.

'샤넬 이전의 코코.' 국내에서 최근 개봉한 <코코 샤넬>의 원제는 이렇다. 사람들이 샤넬을 다룬 영화에 흔히 가질 법한 기대를 처음부터 차단하고 있는 제목이다. <코코 샤넬>은 고아원 출신의 가난한 재봉사가 어떻게 패션 제국의 수장이 되었는가, 그 고단한 여정과 치열한 싸움을 치르는 코코 샤넬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 미숙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그녀가 귀족의 잠자리 상대에서 영국의 사업가 아서 '보이' 카펠의 정부로 옮아가는 과정을 그리며 참 처절하고 구차한 젊은 시절의 가브리엘의 삶을 스크린에 펼쳐놓는다. 젊은 여자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접근을 했다가도, 가브리엘의 그 구차한 여정에 불쾌감을 느끼며 한 발짝 물러서게 만드는 것이다. <코코 샤넬>을 만든 감독이 배우 출신의 여자 감독 안 퐁텐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역시 여자감독이라 로맨스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라는 선입견을 갖기 쉽다. 하지만 이보다는, "역시 여자감독이라 구차한 여자의 인생의 치부를 제대로 까발렸다"는 선입견을 갖는 게 이 영화를 보는 데에 훨씬 이로울 것이다. 갈 데가 없어 어떻게든 쫓겨나지 않기 위해 에티엔의 저택에 붙어있는 과정도 처절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든 사랑을 위해서든 어느 쪽에서도 그녀가 머문 곳은 '정부'의 자리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만든 결혼 따위의 제도, 흥!"이라고 외치는 급진적인 자유연애론자 여성에게도 정부, 특히 유부남의 정부의 자리는 껄끄럽다. 내가 사랑을 주도하며 적극적으로 기성의 권위와 제도를 부정하는 자리이기보다는,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단물쓴물 다 빨리면서도 제멋에 취한 허세의 자리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른 여성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자리가 되기 쉽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결혼이나 연애와 달리, 부르주아들이란 대체로 결혼은 정략적으로, 연애는 정부와 하면서 실질적으로 다부다처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성공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과 '그렇게 해서라도 성공하고 싶다'는 야망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다. 언제나 후자를 선택한 이들은 손쉽게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전자를 고수하는 사람들 역시 그 유혹에 시달린다. 혹은 가끔은, 후자를 선택하는 여자들이 흔히 자산으로 삼는 미모와 젊음을 질투한다. 젊고 미숙한 여성이 후자의 길을 가면서 혹여 상대를 살짝 잘못 짚고 서투르게 간을 보았다가는 무지막지한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사실 홍상수 감독의 초기 작품들도 대체로 그런 젊은 여자들을 비웃는 영화가 주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이런 식의 갈등과 야심 사이를 적절히 타협하고 봉합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은 결혼'에 대한 환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전자의 여성들이 후자의 여성들에게 갖는 경계와 경멸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다른 여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의 '가상의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경계와 경멸은 어느 순간 매우 손쉽게 연민과 이해로 전화되곤 한다. 그러고 보면 <코코 샤넬>을 만든 안느 퐁텐 감독의 시선은 가브리엘 샤넬에 대한 이 양면의 시선을 고루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이미 전작 <프라이스리스>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샤넬로 몸을 휘감은 전력이 있던 오두리 토투가 출연한다는 사실도 퐁텐 감독의 의도를 한층 강하게 설득한다. <프라이스리스>에서 오두리 토투가 맡았던 캐릭터의 진짜 정체는 '꽃뱀'이었다.

Coco avant Chanel

영화의 말미에 비로소 제시되는 "코코 샤넬은 일을 하지 않는 일요일을 가장 싫어했다"는 자막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짐작하게 된다. 샤넬을 진정으로 구원한 것은 상류사회에서의 더부살이도 연애도 아닌, 일, 그러니까 '노동'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그러므로, 샤넬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 결국 '노동의 자격',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신의 노동물에서 소외되는 일반적인 임노동자가 아닌, 장인으로서 노동하는 자가 되는 자격과 여건을 갖추는 과정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셈이다. 남자옷을 입은 채 귀족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샤넬의 모습에서 온몸으로 사회와 부딪치고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샤넬이 결국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남자옷을 입고 다니긴 하되 지배계급 남자들의 지위를 정말로 위협하지는 않아서였을 것이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서 힐러리 스웽크가 잔혹하게 살해된 것은 그녀가 '감히 남자들의 영역을 침범한' 데에 대한 보복과 응징이 아니었던가. 그에 비하면 샤넬의 남자옷 차림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페미닌한 옷을 입지 않는다고 그에게 툴툴대는 에티엔의 태도가 딱 그것을 증명한다. 그녀는 새로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아내와 딸들에게 기꺼이 사줄 만한 옷을 만들어 제공한 셈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샤넬의 성공은 어쩌면 귀족 시대에서 부르주아 시대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간 유럽에서 복장과 표식, 그로 인한 '인간의 몸에 두른 상징'의 표준을 귀족의 것에서 부르주아의 것으로 바꾸는, 시대적 전환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공로의 결과라 할 수도 있다. 바닷가의 억센 어부 노동자들의 작업복에서, 고아원에서 살던 시절 제복에서 영감을 받은 그녀의 소위 '심플한' 옷은, 귀족의 아내보다는 부르주아의 아내와 딸들에게 일차적으로 어필하는 옷이었다. 지금도 샤넬을 선호하는 이들은 전문직 커리어 여성 혹은 소위 '비즈니스 우먼'이다. 샤넬의 옷은, 페미니즘 이전의 시대에도 남자 노동자와 다르지 않게 땀을 흘리며 육체노동을 해야했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평상시 즐겨입을 만한 옷도 아니었다.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샤넬에 대한 칭찬이 지칭하는 '여성'에 과연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얼마나 고려되었겠는가. 언제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패션 거장들이 만들어 트렌드를 일으킨 명품 디자인이 세상을 몇 바퀴나 한참 돈 끝에 세속적으로 한참 하락한 버전의 옷을 입는다. 적어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의 대사에 의하면 그렇다.

재클린 케네디 오아시스가 즐겨 입었고 심지어 케네디가 죽었을 당시 입었다는 옷,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서 소위 '청담동 며느리룩'이라 통칭되는 옷이 바로 샤넬 트위드 정장이라는 사실이 뜻하는 것. 그리고 오두리 토투가 젊은 시절의 샤넬을 연기할 배우로 낙점을 받았다는 것. (물론 샤넬의 현재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오두리 토투 대신 페넬로페 크루즈를 원했다지만.) 이 모든 것이 '샤넬'이라는 대명사가 드러내는 복잡미묘한 빛깔들과 연결된다. 적극 지지하고 존경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은근하고 뒤틀린 호감을 갖게 되는 대상. 그렇기에 매 상품마다 붙어있는 그 비싼 가격에 아이러니를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 샤넬은 그런 사람이다. <코코 샤넬>이 새삼 상기시키는 것 역시 바로 그런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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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4 16:08 2009/09/04 16:08

G.I.Joe

병헌 리는 어디에?

최근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인 김성욱 영화평론가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대한 글에서, 이 시리즈가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하드한 바디'에 대한 열광을 언급하면서 최근 일련의 헐리웃 블록버스터들이 주로 전쟁영화의 양상을 띄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새 창으로 열기)그 글에서 그는 <터미네이터 4>와 <스타트렉 : 더 비기닝>, <트랜스포머 2>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이 변형된 밀리터리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드러낸다. 그리고 막 개봉한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 역시 그가 지적한 바로 그 점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이 일련의 선상에 놓을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애초 제목부터 미군 병사를 뜻하는 이 영화는 나토 산하의 최첨단 비밀 군대인 '지.아이.조' 부대가 최첨단 무기를 노리는 '코브라' 군단과 맞서싸우는 액션을 골격으로 한다. 일반 군인이었던 듀크(채닝 테이텀)와 립코드(말론 웨이언즈)가 부대에 새로 합류하면서 그들의 시점으로 지.아이.조 부대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시작한 뒤, 지.아이.조의 일원으로 코브라의 음모에 맞서는 주축이 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무기들을 사용하는 두 집단의 싸움은 한편으로 판타지의 성격을 띄기도 하고 영원한 맞수인 스톰 섀도우와 스네이크 아이즈의 대결은 검술 액션 및 동양 무술(이라 고 사람들에게 여겨지는 것)에 크게 의지하기는 하지만, 지.아이.조 부대나 코브라 군단 공히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군대들이다. 이들의 싸움에 큰 비중을 할애하는 영화는 결국 전쟁영화로, 그리고 변형된 밀리터리물로 기능한다. 이것은 김성욱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낙관적인 과거로의 회귀와 향수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손상된 미국의 가치와 미국민의 정체성의 회복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아이.조 피겨들이야말로 오히려 일본이 원산지인 트랜스포머 완구들보다도 더욱 미국적인 장난감들이 아닌가.

하스브로 사가 1964년에 처음 내놓은 액션 피겨와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코믹스에 근거하는 <지.아이.조>는, 장난감 완구를 가지고 하드한 액션영화를 만들며 소년관객층 및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자란 남자 어른들을 집중공략한다는 점에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여러 모로 닮은 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하스브로 사는 사실 지.아이.조의 액션 피겨뿐 아니라 트랜스포머 완구를 만든 회사이기도 하다. 그간 트랜스포머와 지.아이.조 피겨들을 바탕으로 TV물과 비디오게임의 제작에 몰두했던 것을 넘어서서, 하스브로 사는 영화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3부작으로 기획된 <지 아이 조> 시리즈의 공동제작사로도 이름을 올리며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하스브로 사는 크레딧에만 간신히 이름을 올렸던 것과 달리, <지.아이.조>에서는 영화의 맨 처음 시작, 그러니까 파라마운트 사의 로고보다도 먼저 자사의 로고를 올림으로써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보다 한결 높아진 '공동제작사'로서의 위상을 자랑한다.

게다가 두 영화에 공통으로 프로듀서로서 이름을 올린 이는 다름아닌 로렌조 디 보나벤추라다. 워너 사에서 해외제작 파트 사장을 역임하며 <매트릭스> 시리즈와 <해리 포터> 시리즈를 발굴해 제작총지휘를 담당했던 디 보나벤추라는 워너에서 독립해 자신의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파라마운트 사와 퍼스트룩 계약을 맺으면서 <콘스탄틴>, <둠> 등을 만든다. 그러다 손을 댄 것이 바로 <트랜스포머> 시리즈이고, 이 시리즈의 성공으로 비로소 <지 아이 조> 시리즈의 제작에 착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G.I.Joe

오오 이 늠름한 어뤼지날 어메뤼칸 솔져를 보라!

마이클 베이의 <트 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로봇들의 변신을 표현하는 비주얼은 10대 이하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다소 과한 면이 있다. 주인공 역시 고등학생(1편) 및 대학 신입생(2편)으로 설정하면서 비슷한 나이 혹은 그보다 살짝 아래의 청소년들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것이다. 미카엘라 역을 맡은 메건 폭스의 몸을 강조하는 비주얼 역시 성인 남성관객과 함께 사춘기 소년관객들의 리비도를 직접적으로 공략한다. 그에 반해 스티븐 소머즈의 <지.아이.조>는 보다 어린 아동들을 타겟으로 하는 아동물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얼개나 구조가 <트랜스포머> 시리즈보다도 훨씬 단순할 뿐 아니라,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 캐릭터들간 갈등을 구축하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유치하다'고 평해버릴 문제는 아닌 것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10세 ~ 12세 아동의 눈높이에 맞췄다는 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아이.조 부대원 중 하나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듀크와 베로니스(시에나 밀러) 간의 애증의 관계 역시 소년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선에서 단순하게 정리돼 있다. 물론 <지.아이.조>의 액션 장면도 <트랜스포머> 못지않게 굉장히 하드한 데다 물량을 대거 투입하기는 했지만, 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 온 부모들을 배려하는 면이 짙다. 오히려 아동물을 이 정도로 하드하고 공들여서 만들었다는 점이 더 놀랍게 여겨진다. 단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공을 들여 표현하는 액션씬 중 하나인 파리 시내 씬에서, 채닝 테이텀의 듀크과 말론 웨이언즈의 립코드는 '증강수트'를 입기는 했으나 수트가 주는 능력을 감당하지 못해 씬 내내 뒤뚱대며 파리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 이 장면은 일차적으로 지.아이.조 부대의 놀라운 무기와 장비들에 대해 두 '신입' 주인공을 통해 관객들에게 경이로운 감탄과 액션의 쾌감에 웃음을 섞어주기 위한 장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자기 능력에 부치는 힘을 갑자기 갖게 된, 몸은 어른이되 정신은 아직 아이인 어린아이들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여기에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지.아이.조> 시리즈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기도 한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말그대로 변신하는 '로봇'이 중점이라면, <지.아이.조>는 아무리 강력한 능력을 자랑한다 해도 '사람'이 중심이 된다. <트랜스포머>에서 전면에 나서는 기계들이 하드한 바디 안에 주체적인 목적과 인격을 지닌 독립적 존재인 것과 달리, <지.아이.조>에 등장하는 기계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연성 육체를 중심으로 신체의 능력을 증강시켜주는 다양한 보조물과 도구에 해당한다. 이는 <트랜스포머>보다 오히려 '전통적인' 관점을 채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G.I.Joe

남의 나라 국보는 왜 부수고 길거리는 왜 난장판으로 만드는지...

 

나아가 로렌조 디 보나벤추라가 자신의 제작사에서 직접 제작을 한 첫 작품이 코믹스 원작인 <콘스탄틴>이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트랜스포머>와 <지.아이.조>의 제작이 가시화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90년대 말에서 최근까지 풍미한 코믹스 출판사들의 영화계 진출 덕이라 할 수 있다. 한동안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톰 클랜시 등의 대중소설들을 블럭버스터의 원천으로 삼아왔던 헐리웃에서 마블과 DC의 주인공들이 스크린을 누비게 되면서 두 출판사가 모두 직접 제작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전히 더 많은 코믹스와 그래픽노블의 주인공들이 스크린에서 실사의 옷을 입기 위해 대기중이기는 하지만, 헐리웃의 제작자들은 코믹스와 소설뿐 아니라 이제는 완구들에 눈을 돌렸고, 하스브로 사 역시 아직은 공동제작의 수준이긴 해도 영화제작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수순은 당연히 게임회사들이다. 그간 영화사에 판권을 파는 것으로 만족했던 게임회사들 역시 직접 영화제작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블리자드는 오랫동안 '디아블로'의 영화화에 공을 들이며 '디아블로'라는 제목을 다른 영화가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어해왔고, 최근에는 '워 크래프트'의 영화제작을 선언하며 샘 레이미와 감독 계약을 맺었다는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그간 시도는 무수했으되 하나같이 실패로 끝을 맺었지만, 완구와 코믹스, 그리고 비디오 게임을 모두 거친 소스들을 영화화한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지.아이.조> 시리즈의 성공은 이러한 양상에 변화를 줄 것으로 보인다. 이미 CG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블록버스터들에 전방위적으로 사용되면서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가능하며 심지어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완숙한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작품들이 바로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트로이>라 할 수 있다. 헐리웃의 블록버스터의 전략변화 그래프에서 하나의 거대한 변곡점을 찍어준 작품들이 케케묵은 고전(!) 문자 텍스트를 원작으로 삼았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어쩌면 이 두 작품이야말로 문자 텍스트를 원작으로 삼은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다. 문자 텍스트와 그림을 결합한 코믹스와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가 두 작품 이전부터 활발하게 영화화되고 있었으며, 지금은 또 다른 매체의 '움직이는 동영상'을 원작으로 한 영화화가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으니 말이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지.아이.조> 시리즈는 말하자면 그 과도기에 있는 영화들이라 할 수 있으며, 변곡점을 지난 직후 첫 시기에 해당하는 변화들을 표현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두 시리즈야말로 이후 헐리웃 블록버스터들이 향하게 될 방향을 예측하게 해주는 등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ps1. 프레시안 기사(새 창으로 열기). 뭔가 리뷰처럼 시작해서 산업기사가 된 듯한, 하여간 스스로 요즘 지지리도 글 못 쓰는구나 싶었던 기사. "영화는 정말 재미있더라... 초딩물이라 생각하면." 이라 말할 때의 그 복잡(...)한 뉘앙스를 살리고 싶었는데, 진지하게 쓰다보니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시니컬한 뉘앙스를 넣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여간 마지막 액션씬은 영화가 가장 공들인 비장의 장면이었는데... 잤다능. 역시 초딩물은 내 취향 아니라능. 나한텐 지.아이.유격대 액션피겨  갖고 논 유년기의 경험 따위가 없기 때문에...

ps2. 은근히 출연진이 화려하다. 채닝테이텀과 시에나 밀러는 원래 아웃 오브 안중이었는데, 영화가 시작하자 거대 기업 회장님으로 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이!! 거기에 미국 대통령이 조너선 프라이스, 지.아이.조. 부대 장군이 데니스 퀘이드, 시에나 밀러의 오빠가 조셉 고든-레빗, 립코드는 말론 웨이언즈라니, 허허. 근데 조셉이가 시에나의 오빠라는 게 말이 되냐능?  조셉이가 훨씬 앳돼보이지 않냐능? 아이고 조셉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

G.I.Joe

이 분 나오는 거 보고 깜놀... 아니 옵빠 여기서 뭐하고 계신가요. (라곤 하나 역시 포스가 넘치심)

 

ps3. 7월 말쯤 봤는데, 보기 전에 이병헌 헐리웃 진출 어쩌고 하는 얘기를 또 하나의 과장의 수사여구로만 치부하고 뭐 조금 나오다 죽겠네 했는데 웬걸, 주인공이랍시고 나오는 애들보다 훨 나은데다 정말 비중이 높아서 또 깜놀했다. 그러고 보면 헐리웃 진출 시도했던 배우들 중에선 가장 알차고 실속있는 결과를 챙긴 듯. 영화야 초딩물이지만 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 같은 분도 나오신단 말이다!! 근데 이병헌은 언제 그리 영어발음도 다듬고 액션도 배웠대? 칼놀림이 무난하두만. 뭐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액션 전문배우가 아닌데 무난하게 해냈으면 굉장히 잘한 거 아니냐능. 하여간 영화에서 제대로 자기 몫 똑 따먹은 듯하여 기특하심. 이 사람은 역시 약아빠진 여우 같음. (이거 칭찬임)

ps4. "얼굴이 나와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었는지 국내에서는 캐릭터 포스터를 다 새로 만들었더라. 사실 미국에서 캐릭터 포스터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병헌이 얼굴 어디갔어, 두건으로 다 가렸구나"라며 말이 많았는데, 영화 홍보하는 입장에선 얼굴 나오는 거로 다시 만드는 게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솔직히 왼쪽 것이 더 간지나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게다가 미국의 캐릭터 포스터들은 다른 애들도 다 얼굴이 잘렸던데.

G.I.Joe

스톰섀도우 오오오 젤 멋지더라

G.I.Joe

이건 악당같지 않아! 무슨 은빛 성기사냐능.

ps5. 스티븐 소머즈의 영화를 모조리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다가 들었다. 그러니까 스티븐 소머즈는 이제까지 쭈욱 일관되게 아동물을 만들어온 감독이구나, 싶더라. 10살 미만의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 가서 두 시간 정도 애들 조용히 시킬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미이라>는 물론이고 심지어 <반헬싱>도 아동물이었어! 라는 깨달음이 문득.

ps 6. 그러고보니 귀염두이 브렌든 프레이저가 카메오로 출연했었다. 보다가 미친 듯이 웃었음.

ps 7. 올블로그에 이병헌 인터뷰(새 창으로 열기)가 떴길래 봤는데 재밌네. 역시 이 사람은 여우다 싶다.

2009/08/12 10:11 2009/08/12 10:11

아마도 근간 가장 ‘괴작’을 뽑으라면 작년 하반기에 개봉한 <모던 보이>와 함께 <차우>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모던 보이>가 괴작인 건 너무 훌륭한 면과 너무 후진 면이 어이없이 섞여서인데, <차우>의 경우는 좀더 '괴작'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즉, 괴상한 영화라는 뜻이다. 언론시사로 처음 <차우>를 봤을 때 워낙 당황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이 영화의 유머를 꽤 즐기게 됐다. 시사 나와서는 모 평론가님과 인사를 하다가 “영화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영화의 지지자 쪽에 가깝다. 사실 <차우>는 개봉 직전까지도 <괴물> 이후 가능성이 보였으나 그만큼 위험도 여전히 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대괴수가 출현하는 재난영화’로,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서 포장돼왔다. 그런 만큼 관객의 입장에선 <괴물>의 완성도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그 2/3 정도는 되기를 기대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확인한 <차우>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대체로 괴수물이란 언제나 우리 세상 너머에 우리 힘으로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괴수의 존재, 우리가 평소 상상은 할지언정 현실에 존재한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존재가 봉인을 뚫고 나와 현실 세계를 위협할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고독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미지와 미래와의 대면을 은유를 읽어내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괴수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세계의 파괴를 쾌감의 코드로 목격하게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쾌감을 두 가지 층위로 즐길 수 있다. 우리 세계가 파괴를 당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며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 혹은 괴수에게 은밀한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얻는 사디즘적 쾌감. 그리고 그 사이, 순수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체가 우리 세계를 때려부술 때에 오는 ‘타격감’. 그러므로 괴수물의 당연한 공식에서 시선의 방향이란 안에서 밖을 향하는 것이 된다.

<차우>가 그런 괴수물이 아닌 것은,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차우>는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과 습격이 가해졌을 때 그 시선을 괴물이 있는 저 너머 바깥 어디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내부로 돌린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양상들을 양식화시켜 보여주고, 여기에 약간의 과장과 비틀기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코미디에 열중한다. 그 ‘외부의 충격’이 <차우>의 경우 식인 맷돼지의 습격인 것이지만, 이쯤 되면 사실 ‘차우’가 얼마나 이상한 변종이고 세고 크고 무섭고 포악한지 기타 등등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사실 맷돼지가 아니라 운석을 타고 떨어진 외계의 괴생명체라 한들 이 영화가 그리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진 않다. 맷돼지는 앞에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 계속 안 나와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일리언>을 모범적으로 베껴서 앞에 계속 나올 듯 말 듯 그림자로만 비추다가 맨 마지막에만 한 번 제대로 나오던가.

어쨌든 뭔가 무시무시한 놈이 잊을 만하면 마을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며 패닉을 가져온다. 절박함은 강도가 심할수록 우스꽝스러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박한 놈만 절박하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또 맷돼지가 공격을 해오거나 말거나, 마치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 약이라도 단체로 먹는 듯 허허실실 천하태평이다. 자기만 안 당하면 된다 이거다. 그러므로 대체로의 괴수물이 절박함에 방점을 찍고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괴수가 화면에 전면 등장하면서 다 때려부술 때의 타격감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맷돼지를 잡겠다며 차우와 대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비장함을 (자기가 당하지 않았다고) 별 거 아닌 것 취급하며 태평한 마을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도 튀어나온다. 맷돼지가 습격하거나 말거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을 활개치는 소위 ‘꽃 꽂은 분’이나 도시인들에게 장사를 해먹는 마을농장 관계자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나 꽃 꽂은 분은 애초에 맷돼지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내 맘대로 장르명을 작명한다면, ‘괴수물’보다는 오히려 ‘농촌소동극’ 정도가 될 듯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신정원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크고 무서운 맷돼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이 영화의 스타일대로라면, 차우가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수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차우

겉보기는 이렇게 멀쩡하고 폼나는데... 사실은 허당이다. 죄다.

농촌소동극으로서, 코미디로서 <차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신정원 감독의 유머감각이 소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굉장히 웃기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도 무지 웃었다. 맷돼지와 싸우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하나하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떨어진 면이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도 상황도 참 어이없이 웃기거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부분이 많다. 멀쩡하게 생긴 형사가 사람들이 안 볼 때면 음료수고 담배고 몰래 챙기고 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잘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 든다거나. 최고의 포수라는 이가 잘난 척 양키 포수들을 대동했지만 그들의 말을 실제론 알아듣지 못하고 선머슴같은 여자에게 가슴을 두근대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거나. 나름 비장한 얼굴로 생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감당하듯 보이던 서울내기 순경이 실제로 집안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신경질로 반응한다거나. 맷돼지에 대해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대포로 수색대를 따라나선 대학원생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꺼내들며 수색대에 ‘연출’을 하려들고 이들 수색대 역시 이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마을이 처한 대위기에 맞서 그 누구 하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폼은 그럴싸하나 알고보면 모조리 허당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편이, 실제 현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영화 속 세상뿐일 테니. 게다가 씨네21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차우의 수색에 나서는 건 죄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뒷짐지고 가만히 있는데 이들 외지인들이 차우를 잡겠다며 나서서 벌이는 소동들이,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문제는 예산이다. 식인 맷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공포와 고난과 분투를 그리는 영화로 선전되며 그 정도의 CG와 예산이 들어간 영화라는 건, 마치 연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길래 스테이크를 먹게 될 줄 알고 기대했더니 맛은 꽤 별미이나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비싼 떡볶이가 나온 형국이라 해야 할까.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새 창으로 열기) <차우>는 순제만 70억에 이른다. P&A 비용까지 합치면 총제작비는 100억원에 육박한다. 너무 비싼 떡볶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떡볶이를 무지 좋아하긴 한다.) 난 차라리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처럼 예산을 적게 들이되 맷돼지의 모습을 그림자나 정황으로만 제시하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우> 식의 코드라면 맷돼지가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의도적으로 조잡하거나 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유머가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 만들려다 안 될 게 너무 뻔해지니까 중간에 차라리 망치려면 제대로 망치자며 막 가는’ 코미디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엄태웅의 엉덩이가 노출되는 게 무슨 찐한 멜러 영화도 아닌 <차우>라는 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지만.

 

차우

큰 웃음 주신 신형사 역의 박혁권.

<차우>를 보는데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계속 생각났다. 처음 맷돼지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 묘지 위 언덕에서 경관들이 차례로 관 앞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롱테이크 씬 역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풀숏으로 먼 거리에서 찍으면서 롱테이크로 가는데 둑방 위에서 누군가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두 영화의 그 장면들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씬으로, <차우>에서의 그 씬을 단순한 개그씬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역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되, 절박함 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봉준호 식 낯선 유머 코드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모두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능란하게 교차된다. 그렇기에 <차우>의 오히려 안으로 향하는 시선과 묘하게 상통하믄 부분이 있다. 이후 <마더>에서도 드러나듯 너무나 생생한, 한편으로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오히려 실은 판타지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한국적인 시골스러움’에 대한 묘사가 신정원 감독의 <차우>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이건 신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난 아직 <시실리 2km>를 보지 못했다.) 다만 <차우>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시도하지만 적절히 통제하는 어떤 코드의 유머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 <차우>를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 그 실소를 진심으로 즐기게 되는 것도, 그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 때문일 것이다.


ps. 지금 시간 23시 39분. 지금 읽어보니 어찌 이리 비문과 오문이 난무하고 글이 엉망진창 왔다갔다 하는지. 글을 조금 다듬었다.

2009/07/27 17:23 2009/07/27 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