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dder Breathless'에 해당되는 글 89건

  1. <아바타> 단평 (6) 2009/12/12
  2. 존 키츠(John Keats) 잡담 (5) 2009/10/21
  3. 초대합니다! 인디포럼 채무변제 파티 - 그렇다면 십시일반 (1) 2009/09/07
  4. 7월 인디포럼 월례비행 :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2009/07/23
  5. <마더>, 봉준호 이력의 전환표가 될까 (19) 2009/05/19
  6. Cinema Blues 번개공지! 음악도 듣고 술도 마시고! (1) 2009/05/12
  7. 인디포럼, 올해의 신작전 상영작 발표 (5) 2009/04/24
  8. 4/17 (금) 번개공지 (저녁 7시, 종로 보신각 앞) (4) 2009/04/15
  9. 조선일보, 역시 대단하다. 새로운 연예잡지 <하이 컷> (6) 2009/03/21
  10. 올해 여성영화제, 기대된다 (6) 2009/03/13
  11. 왓치맨 단평 (10) 2009/02/25
  12. 2009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로비의 풍경들 (2) 2009/02/24
  13. 시네마테크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기 위하여 (2) 2009/02/23
  14.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단평 (2) 2009/02/22
  15. 더 레슬러 단평 (14) 2009/02/20
  16. 핸드폰 단평 (6) 2009/02/18
  17. 서울아트시네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4) 2009/02/17
  18. 레이첼 결혼하다 단평 2009/02/14
  19. 레볼루셔너리 로드 단평 (4) 2009/02/13
  20. 독립영화 발목은 누가 붙잡고 있나? 2009/02/12
  21. 말리와 나 단평 (5) 2009/02/11
  22. 문 프린세스 : 문에이커의 비밀 단평 (2) 2009/02/10
  23.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 인터뷰 후기 2009/02/06
  24. <타이드랜드>에 대한 반쪽자리 수다 (4) 2009/02/05
  25. 하이스쿨 뮤지컬 : 졸업반 단평 (4) 2009/02/02
  26. 다우트 단평 (2) 2009/01/31
  27. 마린보이 단평 2009/01/31
  28.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단평 (4) 2009/01/31
  29. 작전 단평 (2) 2009/01/30
  30. 도쿄 마블 초컬릿 단평 (1) 2009/01/16

올 겨울 대작들의 치열한 흥행접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가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첫 선을 보였다. <아바타>의 배급사인 20세기폭스는 11일 낮 2시 영등포CGV에서 언론시사를 갖고 전세계적인 관심과 기대를 불러모으고 있는 <아바타>를 드디어 국내에 공개했다. <아바타>는 <터미네이터> 1, 2와 <에일리언 2>, <트루 라이즈>의 흥행작들은 물론, 전세계 흥행 1위작인 <타이타닉>을 연출한 제임스 카메론이 12년만에 선을 보이는 영화라는 점에서 전세계 영화팬들의 기대를 모아왔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만을 위해 신기술을 전격 개발, 도입하여 구현한 영화의 장면 중 20분 가량의 동영상을 일찌감치 공개하면서 전세계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Avatar

드디어 베일을 벗은 <아바타>는 과연 모든 점에서 관객들을 놀래키며 새로운 레벨의 시각적 쾌감과 충격을 안겨줄 만하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자랑했던 이모션 캡처 및 가상 카메라의 위력은 놀라움을 넘어서 경이로운 수준이며, 전반적인 CG 기술 역시 놀랍다. (가상의) 판도라 행성을 수놓고 있는 자연과 기기괴괴한 생명체들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파란 피부에 긴 꼬리와 날카로운 귀를 가진 3미터 장신의 나비 종족 및 이들과 인간의 DNA로 만든 생명체인 아바타(그와 DNA가 맞는 인간이 의식으로 조종한다)의 동작과 표정도 매우 자연스럽게 구현됐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반(샘 워딩턴)의 아바타가 나비종족의 네이티리(조이 살다나)와 함께 거대한 새 이크란을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 숲에서 거대한 생명체에 쫓기는 장면 등도 박진감이 넘치거니와, <에일리언 2>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장면들을 뛰어넘는 전투씬들도 관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다. 2시간 42분의 다소 긴 러닝타임이지만 단 한 순간도 지루해할 틈이 없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벌이는 대규모 전투씬은 그 어떤 이전의 전쟁영화보다도 화려하고 큰 스케일을 자랑한다. 거기에 <타이타닉>에서 다소 실소를 자아냈던 로맨스도 이 영화에서는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러우며 설득력있다. 액션과 모험, 로맨스,그리고 전쟁영화 등 모든 장르가 한 영화 안에 들어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만족스럽다. 한마디로 <아바타>는 속이 꽉 찬 종합선물세트다.

그러나 <아바타>의 놀라움이 단순히 새로운 테크널러지나 화려한 볼거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바타>는 단순히 낯선 행성에서의 모험과 상투적인 두 문명의 충돌 및 전쟁만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인류가 '문명화, 근대화'의 이름으로 침략과 전쟁을 자행했던 이른바 '식민지 근대'의 역사를 혹독하게 비판하며 자연 속에서의 공존을 강조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판도라 행성 도처에 깔려있는 값비싼 언옵타늄이라는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판도라 행성에 기지를 설치하고 채굴을 하는 인간의 탐욕은 곧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남아메리카를 침략해 식민지화했던 근대 유럽의 식민전쟁을 연상시킨다.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어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며 살아가고,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며 죽은 동물들의 영혼을 존중하는 나바족들의 생활풍습은 우리가 흔히 '인디언'이라 불러왔던 아메리칸 네이티브들의 풍습과 닮았다. 쿼리치 대령의 지휘 하에 이들의 정착지가 무자비한 공중폭격을 당하는 장면은 곧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벌어졌던 네이티브 학살 및 착취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지옥의 묵시록>에서의 그 유명한 폭격 장면을 연상시키며 베트남 전의 이미지까지 끌어들인다. (이 장면에서 쿼리치 대령이 사용하는 작전 이름도 '발키리 1-6'이다.) 때문에 영화 중반, 나비 종족들의 거주지가 폭격당하는 장면은 그 엄청난 스케일과 스펙터클 때문에 더욱 참혹하고 경악스러운 학살과 파괴의 공포를 전달한다.

<타이타닉>에서도 제임스 카메론은 거대한 재난영화의 틀 안에 계급사회의 폭력과 휴머니즘을 담으려 시도한 바 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도 그는 일차적으로 눈을 유혹하는 뛰어난 시각효과와 놀라운 상상력 아래에 '기계조차도 배우게 되는' 휴머니즘을 심어놓았다. 하지만 전작들에서 카메론 감독이 시도했던 이러한 '메시지'들은 언제나 화려한 볼거리 앞에서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앙상하게 그 얕음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바타>는 공백의 12년 동안 카메론이 그저 영화의 테크놀로지만 고민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담아야 할 메시지와 철학을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바타>는 감히 '영상 혁명'을 자처하는 데에 토를 달고 싶지 않을 만큼 혁명적인 기술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카메론의 전작의 어떤 영화들도 도달하지 못했던 깊이있는 근대문명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수행한다.

<타이타닉>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제임스 카메론은 "나는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친 바 있다. <아바타>를 내놓은 뒤의 제임스 카메론은 "나는 영화의 신이다"라고 자처해도 그 누구도 감히 반박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될 듯하다. 아마도 <아바타>의 흥행 역시, 단순히 다른 영화들에 비해 얼마나 흥행할 것인가보다 이제 그 자신이 세운 <타이타닉>의 기록을 과연 깰 수 있을 것인가가 더욱 화제가 될 것이다.


ps1. 영화가 끝난 시간이 5시. 지하철 타고 사무실 오면서 지하철 안에서 쓴 기사(새 창으로 열기). 일단은 단평, 제대로 된 리뷰는 다시 쓸 예정. 어쩌면 두어 번 더 볼지도.

ps2.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 후반부의 전투씬들에 열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판도라 행성에서 제이크가 네이티리로부터 나비종족이 문화와 풍습을 익혀나가는 전반부가 훨씬 좋았다. 약육강식이 지배하고 있지만 '순리대로' 살아가며 균형을 지키는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나비족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후반부 전투씬은, 오히려 전투기가 불덩이가 돼서 떨어지며 나무들을 태울 때마다 보는 게 고통스럽더라. 내게는 '신나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씬'이 아니라 저 아름다운 곳이 다 망가지고 파괴되는 상실과 아픔의 전투씬이었다. 사실 그 전, 발키리 1.6 장면에서 아미 나비족의 거주지가 다 파괴돼버리는 바람에... 그 공중폭격씬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는.

ps3. 사실 한번도 제임스 카메론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여전히 리들리 스콧의 1편을 더 좋아하며, <터미네이터> 시리즈도 그렇게까지 열광하며 좋아하진 않았고, <타이타닉>은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바타>를 보고나서 든 생각은, "야 그냥 너 짱먹어라" 뭐 이런 느낌. 그리고 헐리웃에서 로버트 저멕키스와 함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기술오타쿠인 그의 그 집념의 장인정신은 인정해줄 만하다는 거.

2009/12/12 10:52 2009/12/12 10:52

부산에 초청된 제인 캠피온의 신작 <브라이트 스타>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실화를 토대로 한다. 25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그는 생전에 딱히 그 위대한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지는 못했다. 어릴 적 천애고아가 되고 생계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어찌어찌 의대를 졸업해 의사 자격증을 3년만에 땄다는데, 그가 의학엔 별 관심이 없고 시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었던 것을 아는 가까운 친구들, 특히 시인 / 시인 지망생 친구들은 그가 3년만에 의사자격증을 딴 것에 대단한 질투와 허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키츠는 패니 브론과의 절절한 연애로도 유명한데, 패니가 말하자면, [오만과 편견]으로 쳤을 때 미스터 다아시 같은 남자 하나 낚으려고 사교계에서 좀 나대는, 엘리자베스 베넷 정도 가문의 여자였던 모양이다. 리즈 베넷이야 지성미와 유머가 풍부한 여인이었지만 패니는 또 그런 타입은 아니었던 듯, 영화 <브라이트 스타>에서도 키츠를 후원하는 그의 작가 친구 찰스 브라운은 패니를 너무나 못마땅해 해서, 그녀를 "남자나 꼬시려고 사교계에서 꼬리 흔들고 다니는 무식하고 허영심만 센 여자" 취급을 한다. 하지만 패니를 그리는 제인 캠피온의 시선은 그닥 삐뚜름하거나 시니컬하지 않다. 영화의 초반, 키츠를 처음 사교파티에서 만난 뒤 패니가 키츠의 시를 그 앞에서 읊으면서 작업 한번 들어간 뒤, 그녀는 "시를 공부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며 다시 키츠를 찾아간다. 물론 이 역시 삐뚜름하게 보자면 '작업의 2차 작전'으로 보일 수 있고 제인 캠피온 역시 그렇게 보일 수 있음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찰스에게 패니의 얄팍함이 폭로당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제인 캠피온은 패니의 이런 에피소드를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다른 방향에서 패니의 진정성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시켜 버린다. 영화가 끝나고 기억되는 것도 그녀가 찰스에게 봉변을 당하며 그 얄팍한 허영심이 폭로당한 것보다는, 키츠에게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갔을 때 그 반짝이던 눈빛, 그 눈 안에 담겼던 동경과 열망이다. 나처럼 시에 문외한인 사람에겐 그 장면이 더욱 크게 남는다. 나 역시 영화가 끝난 뒤 "키츠의 시를 알고 싶다, 이해하고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들었으니까. 하여간 <브라이트 스타>에 대한 리뷰는 이미 여기에 쓴 바 있고.

Bright Star

존 키츠, 혹은 존 키츠로 분장한 벤 위쇼의 고혹적인 눈. (<브라이트 스타>)

며칠 전 모 극장을 갔다가 바로 옆 서점에서 민음사에서 출간한 김우창 번역의 키츠의 시선집 [가을에 부쳐]를 샀다. 이후 웹 검색을 해보니 그 외에 키츠에 대한 다른 책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오래 전에 대학출판부 같은 데에서 나왔다가 절판, 절판, 품절.) 이 기회에 영국 낭만파 시인들에 대해 동냥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낭만주의 문학'같은 키워드로 돌려봤지만 역시 헛수고다. 사실 또 다른 방식의 치열한 시대정신이었던 낭만주의가 국내에서는 현실도피용으로 포장되고, 그에 따라 리얼리즘이나 자연주의를 신봉한 이들에겐 또 다시 부당하게 폄하되는, 그런 식의 분위기가 없었던 것 같지 않다. 결국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형식의 외피와 감정적 나르시시즘에만 집착하고 과장한 것 정도로 오해된 분위기가 있달까. 아니 근데 센티멘털리즘과 로맨티시즘이 동의어는 아니잖아, 그게 문학이든, 회화든. 영화쪽으로만 보자면, 근래 들어 국내에서도 조금씩 낭만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엔 최근 허진호가 내놓은 <호우시절>이야말로, 제대로 된 낭만주의의 본격적인 부활의 바람의 서두에 놓아야 할 것같다. "허진호가 변했다"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흥미롭기는 하지만.

외서 쪽을 돌려보니,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문고판으로 그의 주요 시와 편지 일부를 편집해놓은 책이 보인다. 랜덤하우스에서는 그의 시 전체를 모아놓은 책도 내놓고 있는 상태다. 오디오북으로는, 새뮤얼 웨스트와 마이클 쉰이 낭송한 CD도 보이고. 마이클 쉰이, 그러니까 <더 퀸>의 토니 블레어와 <프로스트 vs. 닉슨>의 프로스트로 나왔던 배우인 그 마이클 쉰이 맞나 싶어 찾아보니... 허허, 맞네! 새뮤얼 웨스트는 좀 낯선 이름이라 찾아봤더니 <반 헬싱>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출연했다는데 필모그래피가 어째 다 단역 및 조연. 그... 근데, 잘 생겼다? 허걱, <하워즈 엔드>에 조연으로 출연해 BAFTA상 남우조연 부문 후보로 올랐었어? 뭐, 옥스포드 출신? 런던드라마평론가협회 세익스피어상 수상... 엄훠 나 이거 사야 하는 거 맞는 거? 뭣보다 잘생긴 것에 침 주르릅... 아니, 잘생기기도 잘생겼지만 딱 목소리 멋있게 생겼단 말이야! 예컨대 케네스 브래너의 목소리로 세익스피어 낭독을 듣는다고 쳐봐, 그게 그냥 목소리인가? 주르르 몸이 녹아내려 황홀경에 빠뜨릴 천상의 음악이지!

<브라이트 스타>의 말미에도, 그러니까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 영화에서 키츠로 출연한 벤 위쇼가 나지막하게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를 낭송한다. 정확히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 나오기 시작해, 마지막 카피라이트 표시와 제작사 로고가 끝날 때 낭송도 끝이 난다. 벤 위쇼의 나직하면서도 팬시하고 발음 좋은 목소리와 키츠의 시가 어우러져, 비록 눈은 자막을 뒤쫓느라 정신없었긴 해도, 도저히 그냥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게 나만 그런 건 아닌 게, 대체로 아무리 영화제라고 해도 엔딩타이틀 올라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대면서 일어날 듯 말 듯하며 짐을 챙기지만 이 영화의 자막 땐 아무도 그러지 않더라. 만약 영화가 국내에서도 정식으로 개봉한다면, 그 시의 낭송을 꼭 즐기시기 바란다.



[부록] John Keats, 'Bright Star, Would I were Steadfast As Thou Art


ps1. 온라인에서 이런 페이지도 발견. 참고하시라.

ps2. 듣자하니 벤 위쇼는 영화 찍기 전엔 키츠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잘 몰랐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인 캠피온의 벤 위쇼 칭찬은 정말... 으하하하! 처음 만나자마자 느낀 것이 "세상에, 당신 정말 아름다운 피조물이잖아!"였다니, 난 캠피온 언니의 취향이 듬직한 돌쇠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출처는 여기(새 창으로 열기).

2009/10/21 02:17 2009/10/21 02:17

프레시안 관련기사 : 어렵고 힘들어? 그럼 십시일반 해야지! - 인디포럼이 채무변제 파티를 여는 이유(새 창으로 열기)

기자이면서 인디포럼 상임작가회의에 속해있어 저 기사를 쓰는 데에 좀 애를 먹었습니다. 기자의 양심이란 건, 대체로 자신이 설사 적극 지지하고 있는 대상이라 해도 어느 정도 거리를 취할 때 건사하기가 쉬우니까요. 그래서 웬만하면 어느 단체에 안 속해있는 게 좋은데... 여전히 고민중입니다. 그러나 제가 인디포럼 상임작가회의에 여전히 속해있는 이유는, 한편으로 다른 생각도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저의 양심을 걸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디포럼을 비판해야 할 때가 온다면, 그 누구보다도 매섭고 통렬하게 비판하겠다는 의지를 전제하는, 양심을 건 지지란 뜻입니다. 만약 제 양심과 위치가 충돌할 때가 온다면, 그땐 또 그때 가서 가장 현명하고 ‘옳은’ 판단과 실천을 해야겠지요.

인디포럼에서 채무변제 파티를 엽니다. 시절은 수상하고, 들려오는 소식들은 어이가 없거나 암울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잘 먹고 잘 자며 잘 놀고 잘 웃으며 힘을 내야 합니다. 말만 ‘초대’지, 실은 오셔서 돈 좀 쓰시란 자리입니다. 하지만 같은 만 원이라도, 좀더 보람차게 먹고 마시며 노는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인디포럼 채무편제 파티가 바로 그런 자리가 될 것입니다. 밑에 붙이는 웹자보를 참조하시고, 기왕이면 웹자보에 안내돼 있는 계좌로 미리 티켓값을 송금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살포시 제 블로그에 비밀댓글을 달아주시면, 파티장 당일 현장에서 티켓을 드리겠습니다. 이 티켓은 액면가 만 원 상당의 술과 안주를 드실 수 있는 티켓입니다. 오셔서 노바리를 찾으셔도 되고 N.을 찾으셔도 됩니다.

indieforumparty_re

2009/09/07 18:54 2009/09/07 18:54
7월에도 마지막 주 화요일에 어김없이 인디포럼 월례비행이 열립니다. 이번 월례비행에서는 '미디어'를 주제로 단편 세 편이 상영됩니다. 끝나고 나면 회비 1만원에 뒷풀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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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3 15:12 2009/07/23 15:12

<마더>는 아직 국내에서 상영된 적은 없다. 공식 언론시사는 내일이고 아마도 매체마다 기자들이 미어터져 나올 것 같다.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지는 가운데 현재 칸영화제에 가 있는 듯한 씨네21 김도훈 기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간략한 소개글을 올렸다.(새 창으로 열기) 벌써 어제 얘기다.

일련의 386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에서 그 기저에 공통적으로 "애타게 아버지를 찾고 있다"고 일전에 이곳 어느 글에 쓴 적이 있다. (찾아보니 최양일 감독의 <수> 리뷰 본문과 댓글(새 창으로 열기)에 주루룩 있다. <괴물> 간단 감상문(새 창으로 열기)에도.) <괴물>은 그 정점이었다. 나아가 나는 그 괴물이 <괴물> 속 가정에 결여되어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라 보았다. 사실 이건 너무나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 가족에 어머니는 없고, 괴물의 입속에서 끈끈한 점액질의 타액으로 뒤덮여 있던 아이들을 송강호가 끌어내는 장면은 딱 자궁에서 아이를 끄집어내는 이미지이지 않는가. 거기서 폭압적이고 강한 어머니 / 여성에 대한 공포를 읽었다. <괴물>의 가족에 만약 어머니가 존재한다면, 서울을 풍비박산내는 괴물의 이야기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봉준호는 <괴물>을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 성장하는 - 영화로 만들어야 했고, 괴물과 대적하는 것 역시 그런 덜떨어진 아들이자 아버지, 즉 송강호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어머니를 등장시킨다면 바로 그 어머니가 아들/아버지의 자리를 대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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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여성의 성기 상징인 동굴과 아이들.

봉준호가 그려내는 (성인)여성들은 대체로 남자들보다 강하다. 육체적으로 강한 것이 아니라 그냥 우월한 존재,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서의 존재다. 그런데 내게는 봉준호의 그런 강한 여성에 대한 편애와 더불어 공포가 강력하게 읽힌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이성재를 언제나 주눅들게 만드는 잘나가는 아내도 그렇고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의 귀를 파주며 마을의 야매 의사 노릇을 하던 송강호 아내 전미선도 대체로 주인공 남자보다 우위에 서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지만, <괴물>에서 '괴물'은 아무리 봐도 암컷이자 어머니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괴물>은 아들이 아버지로 성장하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자신을 폭압하는 어머니에 대적하는 영화가 된다. 이는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어머니는 자식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다 아들의 칼을 맞는 거라면, 살부(殺父) 의식 및 아들의 아버지 권력 탈취라는 전형적인 신화 모티브에서 부모의 성을 역전시킨 것이라 더욱 흥미롭기도 하다. 대체로 강한 아버지와 여기에서 이도저도 못한 채 자식을 아버지로부터 적절히 보호해주지 못하거나 아버지의 폭력의 희생자로 존재하는 어머니, 라는 게 훨씬 전형적이고 공식적인 틀 아닌가. (근데... 나는 왜 이런 이야기를 여기에다가는 쓴 적이 없더라? 아, 생각났다. 나는 이런 내용으로 당시 씨네21 평론가 공모에 응모하려고 했다. 그리고 결국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 헐...)

그런데 <괴물>이 상영될 당시에 그 영화를 그런 식으로 읽는 평이 별로 없어서 좀 놀랐다. (그랬으니 평론가 공모에 그런 내용으로 응모하려 했던 거지만.) 심지어 내가 그 얘기를 당연한 듯 했을 때 두 사람으로부터 "그것 참 놀랍고 참신한 해석"이라는 경탄까지 들었다. (반면 전현직 기자인 한 명은 "그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라고 반응했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 작품으로 <마더>가 제작될 것이란 소식을 들었으니, 내가 얼마나 더 놀랐겠는가. <괴물>에선 빠져있던, 오히려 '괴물'로 표현되었던 어머니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라. 나는 봉준호가 과연 어떤 식으로 <마더>를 만들지 궁금해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괴물>을 그리 읽은 결과에 의하면, <마더>는 '무시무시하고 무서운 어머니'에 대한 얘기여야 했다. 사실 <마더>의 시놉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나왔을 때 <괴물>에 대한 내 독해가 완전히 허방다리를 짚은 것 아닌가, 싶어 불안하기도 쪽팔려하기도 했다. 언론이 전하는 '이런 내용이라 카더라' 통신은 주로 눈물겨운 모성애 쪽에 맞춰져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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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서 영화를 본 듯한 김도훈의 글을 보노라니, 내가 생각했던 방향이 맞는 거 같아 또 다시 살짝 놀랍다. 역시, 그런 거였군. 그러고나니 이제 궁금해지는 건, 과연 <마더>가 봉준호의 이력에 어떤 터닝포인트가 될까, 하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극히 절제돼 있거나 억누르고 있던 봉준호 특유의 썰렁한 블랙유머 코드가 <괴물>엔 다소 이질적으로 여기저기서 스멀대며 나오고 있는 걸 보면서, 그리고 <괴물>이 대중적이고 전형적인 장르영화로서의 괴수영화의 문법을 상당히 비트는 것을 보며 예상한 바가 있다. 아마도 다음 작품에선 자신의 본색을 완전히 드러낼 것이며, 그 작품은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만큼 흥행하진 못할 것이라고. 나아가 자칫하면 논란만 불러일으키다 완전히 쫄딱 망할 수도 있겠다고. (사실 나는 자기 색을 살짝 입힌 장르영화를 장르적으로 잘 만드는 사람이 그걸 포기하고 자꾸 예술하려 드는 것은 좀 못마땅하다. 봉준호 감독도 자기 색깔을 적절한 선에서 좀 조절하고 절제하면서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싶은데, <괴물>에서 이미 선을 조금 넘었기 때문에...)

<마더>의 경우 칸영화제 초청이라는 변수 때문에 한껏 주목과 기대를 받고 있는 상태니 흥행도 <살인의 추억>만큼은 되거나 그렇지 않다 해도 그보다 그저 조금 못한 수준일 것이다. <괴물> 같은 흥행은 힘들 듯. 그러나 감독의 영화적 경력과 미학적 프레임에서는 충분한 터닝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모처에서 진행하고 있는 밀착취재 건을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내일 꼭 <마더> 시사회를 가야겠다. <박쥐>처럼 개봉 전 일반시사는 거의 없을 듯하니.



ps. J.는 방금 <마더>에 있다는 반전에 대해 좀 놀라운 추측을 했는데, 나는 그 추측이 거의 맞겠구나 싶다. 그게 뭐냐면... 직접적으로 쓰진 않겠고, 다만 그 추측이 맞다고 생각한 이유를 밝혀보려 한다. 다만 정말 맞을 경우 원치않은 스포일링, 게다가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스포일링이 될 수 있으므로 이 뒷부분을 화이트로 가려놓겠다. 궁금하면 긁어보시라. 위에 <괴물> 사진에서 보면 아이들이 괴물을 피해 동굴에 숨어있는데, 캡션에도 썼지만 동굴 역시 여성의 자궁과 질을 상징한다. 자궁의 이미지는 양면적이다. 더없이 안전한 공간, 더없는 보호를 제공해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미끼로, 그러니까 어머니가 보호욕을 내세우며 이미 세상에 나온 자식을 자신의 자궁으로 넣으려 하는 순간 그곳은 더없이 폭압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 <괴물>을 보며 내가 추측한 봉준호의 어머니에 대한 근원적 공포란 결국, 자식을 제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폭압적이고 권위적이며 강력한 어머니인데... 그렇다면 '지능이 모자란 아들'이란 설정은 실은 아들이 정신적으로 미발달한 것이고, 이는 어쩌면 어머니의 권위적인 과보호와 소유욕, 그러니까 아들을 제 자궁에 여전히 (안전하게) 가둬놓고 싶은 어머니의 양육의 결과일지도. 그렇다면... ^^ 그런 엄마들은 자신이 얼마나 헌신적이고 좋은 엄마인지 증명하지 못해 안달이므로... 게다가 다른 여자에게 수작질을 걸었다면 더욱...

2009/05/19 20:58 2009/05/19 20:58

아무리 힘들고 바쁘게 살아도 우리에겐 빵뿐 아니라 장미도 필요합니다. 그 어떤 장미보다도 아름다운 장미가 될 음악회가 이번 주에 열리기에 또 다시 번개를 쳐봅니다. 함께 모여 음악도 듣고 술도 한 잔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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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비 있습니다. 일단 입장료 만원 + 뒷풀이비용 알아서. 학생의 경우 제맘대로 뒷풀이비용을 막 깎아드리겠습니다. 오실 수 있는 분들, 일단 7시에서 7시 10분 사이에 장천아트홀 바로 앞에서 뵙지요. 전 7시까지 가있겠습니다. 오실 분들, (비밀)댓글로 이멜주소 알려주시면 제 폰번호 쏘겠습니다. 자, 그럼 금요일 저녁 때 뵈어요!

2009/05/12 17:00 2009/05/12 17:00

인디포럼 올해의 상영작이 지난 월요일 발표(새 창으로 열기)됐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나는 인디포럼의 신작전 섹션에서 총 505편의 출품작 중 저 상영작 55편을 선정하는 프로그래머 네 명 중 한 명이었다. 5월말 열리는 인디포럼을 위해 앞으로도 이런저런 것들, 예컨대 카탈로그에 들어가는 프로그램 노트 쓰기라던가 시간표 짜기 같은 일정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가장 크고 어려운 산은 일단 넘은 셈이다. 한 달 남짓 기간 동안 장, 단편 포함해 280편 가량의 영화를 봤다. 지난 한 달 간 글이 거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막판에는 회사에서 일은 때려치운 채 낮에도 영화를 봤고, 밤에는 진한 커피와 박카스와 비타민씨를 먹어가며 거의 매일 밤을 새며 영화를 봤다.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고 특히 내 일정 때문에 프로그램팀의 다른 멤버들을 힘들게도 했지만, 사실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기도 했다. 특히나 몇몇 작품들은 보면서 엉엉 울다가 웃다가, 이 좋은 작품들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보고 발굴하는 데에 내가 일조를 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닌데도 괜히 내가 다 뿌듯했고, 몇몇 작품들은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을 정도다. 단편이긴 해도 이건 그대로 극장에 개봉해도 되겠다 싶은 작품도 있었고, 다소 서툴지만 열정과 진심이 느껴지는 작품도 많았다. 찬찬히 그와 그녀의 슬픔과 절망을 들여다보는 작품들, 그리고 어떻게든 어깨를 토닥토닥하고 싶은 감독의 진심도 느껴졌다. 잘찍고 못찍고를 떠나 모든 작품들이 참 소중하고 예뻤다. 오히려 어렵고 힘들었던 건 영화를 줄기장창 보는 게 아니라, 50여 편을 골라내는 거였다. 아깝게 탈락한 작품들이 너무 많다. 영화제 기간만 더 길고 상영관이 더 있었다면 얼마든지 틀었을 작품들. 하지만 인디포럼에선 상영이 안 됐더라도, 다른 영화제에서나마 상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보는 순간 반해버린 데다, 보는 내내 가슴을 부여잡으며 엉엉 울었던 영화가 있다. 다른 훌륭한 작품들도 너무나 많았지만, 280여 편 중 내게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그 작품은 결국 올해 인디포럼의 폐막작이 됐다. (올해 인권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하다.) 워낙 이 영화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터라 폐막작에 대한 소개글을 내가 쓰게 됐는데,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보는데도 여전히 눈물이 펑펑 솟는다. 특히 맨 마지막에 박힌, '고 이근재 님께...'라는 자막을 보고선 더 그러하다.

수많은 죽음들이 너무 쉽게 잊혀진다. 그렇게 잊혀진 수많은 죽음 중 하나를, 이 영화가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그걸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 새삼, 영화기자가 되기를 너무 잘했다, 생각한다.

올해 인디포럼은 5월 29일부터 6월 5일까지 열린다. 홈페이지는 여기(새 창으로 열기)다.

2009/04/24 02:04 2009/04/24 02:04

4/17 금요일 저녁에 번개를 치면 과연 얼마나 모이려나요. 이곳 Cinema Blues 드나드시는 분들, 제 개인 블로그 드나드시는 분들, 함 모이죠.

그날 국립오페라합창단 + 기륭전자 분회 등 비정규 투쟁장 공동 촛불음악제가 열립니다. 7시 종로 보신각 앞. 참, 가깝고 가기 쉽죠~잉? 음악도 듣고 투쟁구호도 함께 외치다가, 근처 술집으로 이동해 맥주나 한 잔 합시다. 올 수 있는 사람들 댓글 달아줘요. 전 요즘 급 바쁜 일이 있어서 오래 있지는 못하지만, 최근 인기리에 프레시안에 영화칼럼을 연재하고 계신 이택광 교수님과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라는 책을 내고 인기 책 저자로 등극한 한윤형 씨가 함께 참석할... 수 있도록 꼬셔볼 예정입니다. 그러고보니 아직 말도 못 꺼냈네. 윤형 씨, 올 거죠? 이택광 선생님께는 며칠 전 얼핏 말씀을 드리긴 했는데. 인기 캡숑 짱 저자인 쟁가님도 웬만하면 오시도록 꼬셔보겠습니다. (장담은 못 함.)

얼굴도 잘 몰라 부끄러워 못 올 거 같다는 분들. 초면이면 뭐 어때요. 제가 슈퍼울트라캡숑 빅 스마일을 만면에 띄고 뜨거운 환대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접선을 하느냐... 요건 오늘 내일 고민 좀 해보죠. 아이디어 내셔도 좋구요. 뭐 다 같이 "비정규직 좀 철폐하라능?" 뭐 이런 문구가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다던가... 초에다 빨간색 띠를 두른다던가... 음악회에만 왔다가 가셔도 좋아요. 사실 이 번개의 진짜 목적은 음악회 참석...

2009/04/15 20:15 2009/04/15 20:15

일하다 말고 이 새벽에 편의점에 간식을 사러 갔다가, HIGH CUT이라는 제호의 새로운 신문/잡지를 봤다. <꽃남>의 구준표의 사진이 1면에 커다랗게 표지로 박혀있는데 종이질이나 사진, 편집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건... 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데? 매주 1, 3주 금요일 발행하는 격주간에 창간호라 한다. 가격은 무려 3백원. 어라, 모델로 삼아야지, 반가워하며 사왔다. 게다가 이 판형에 이런 형식은, 오늘 김성욱 프로그래머와 전화로 나눈 얘기도 있거니와, 오프라인 영화잡지가 가야할 더없이 적절한 대안으로 보였다.

오는 길에 신도 났고 기대도 컸다. 프레시안에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원고를 실으며(새 창으로 열기) 정작 글을 쓴 김 프로그래머는 아쉬움을 표하는데 내가 막 우쭐하고 뿌듯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영화 저널리즘에 대해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대에 차 있었다. 이번 주 내내 김 프로그래머와 통화를 하며 나눈 얘기도 그거였고. 거기에 어쩌면, (물론 준비 기간이 걸릴 테고 준비를 위한 기초 조사를 내가 해야 하는데 시작조차 못 하고 있지만) 오프라인 타블로이드 지를 만드는 계획에 대한 얘기가 모처에서 있기 때문에, 이 잡지가 비록 연예인 화보나 가십만을 다루고는 있지만, 이 형식을 빌어 좀더 고급스러운 글을 실은 매체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집에 와서 첫 면을 펼치고 에디터 페이지를 보는 순간... 참담했다. 발행인/대표이사 방성훈. 에디터 페이지 맨 밑에는 <HIGH CUT>은 <스포츠조선>과 함께 한다고 써 있다.

참, 역시 대단한 조선일보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조선일보는 언제나 매체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선도해 나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가 내가 지향하는 가치와 다른 가치를 지향해서 그렇지, 이들의 이런 능력은 질투가 날 정도로 뛰어나고 감각적이다. 좌파들이 이거 본받아야 한다니까... 그러나 문제는 역시, 자본일 터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판형에 이런 고급스러움으로 영화 매체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변함이 없다. 시장조사부터 슬슬 시작을 해야겠다.



ps. 여기(새 창으로 열기)를 누르면 이 잡지 1면 전체를 볼 수 있다.

2009/03/21 03:14 2009/03/21 03:14

프레시안 기사 : 올해 여성영화제, 첨예한 여성 정치성 전면에(새 창으로 열기)

누차 강조하지만, 일상에서 정치와 일상을, 혹은 정치와 문화를 무 자르듯 나누고 정치를 강조해 발언할수록 일상의 정치는 소외된다. 그것은 일상은 정치와 동떨어져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확산시키며, 이는 결국 여의도 정치에만 목을 매다는 결과로 나아가며, 이것은 곧 냉소와 정치 무관심,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직결된다.

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4월 9일 ~ 16일, 신촌 아트레온.

그런 의미에서 올해 여성영화제의 프로그램은, 여성영화제가 언제나 그랬지만서도 유난히 정치성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라할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프로그램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이 찔끔날 정도로 감동했다. 더욱이 홈에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여성노동자'로서 주체로 서는 과정으로 묘사한 영화, 사당동에서 철거된지 22년간 철거와 빈곤의 되물림을 3대에 걸쳐 조망하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 상영된다고 하는데이 어찌 흥분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여성노동과 빈곤이, 이번 여성영화제 특별전 두 개 중 하나의 주제다. 그래서 국제학술회의도 열린다. 게다가 고령 여성들의 성과 사랑은 물론, 자아 찾기 등을 다룬 영화들도 상영된다 한다. 이것이 다른 특별전 주제다. 이 두 섹션만 성실히 봐도 올해 여성영화제는 개개인에게 보석으로 남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10대 여성이 직접 찍은 영화 중, 자신을 스스로 비디오 액티비스트로 정체화한다거나, 혹은 로드스쿨러라 명명하는 영화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또 감동했다. 이주노동자 워크숍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사람 하나가 갑자기 애 낳으러 실려가느라 졸지에 그 남편은 출산기를 찍었다는 얘기도 반가웠다. 이렇게 삶과 영화와 정치는 하나이다.

그리고 올해에도, 아녜스 바르다 할머니가 온다. 프랑스는 유난히 여성배우들과 여성감독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곳이지만, 역시 아녜스 바르다의 활동은 눈부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영화, <3시에서 5시 사이의 클레오>는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남편, 자크 드미 감독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영화는 보고 감동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남편의 영화 세계를 조망하는 다큐멘터리 한 편과, 자신이 헌신적으로 돌본 남편의 말년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찍은 터다. (나는 자크 드미의 아름다운 세계를 전적으로 아녜스를 통해, 그녀가 만든 <자크 드미의 세계>를 통해 입문했다.) 그리고 올해, 자신의 해변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아녜스의 해변>을 들고 서울을 찾는 것이다.

이밖에도 현재 한국 밖, 전세계를 돌며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있는 김소영 감독의 <나무 없는 산>과 이경숙 감독의 <어떤 개인 날>도 상영된다.

나는 언제나 매해 영화제 시즌의 맨 처음을 알리는 여성영화제가 올해, 예산도 줄고 상영작도 줄고 전체 규모가 준 가운데에서도 이토록 야심만만하게, 잘 벼리고 벼린 칼을 마침내 툭 내밀듯 자신만만하게 상영작들을 내세워준 것, 그리고 그 전면에 이토록 첨예한 정치를 툭 내밀어준 것에 너무 감사하다. 아울러 가슴이 너무 뛰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기대하고 있다. 작년 10주년을 지내고 11회를 맞으며 '처음부터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영화제를 하겠다는 여성영화제의 약속은 과언 허언이 아니었다. 한동안 오르가즘을 찾는 데에만 너무 골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짝 했었다. 이건 사실 몇 년간 여성영화제를 제대로 못간 나의 지독한 편견과 잘못된 생각일 가능성이 더 많지만... 단적으로 여성영화제에서는 마르가리타 폰 트로타 특별전을 한 적도 있으니까. 근데 올해는, 정말 멋진 여성영화제로 아주 단단히 심기일전을 한 듯하다.

2009/03/13 02:26 2009/03/13 02:26

잭 스나이더, 만세!!!!!  (당신이 <300>(새 창으로 열기) 바로 다음 작품으로 사고 한 번 칠 거라고, 난 이미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규!)

2시간 41분. 길다 =.= 어쨌든 잭 스나이더는 드디어 <왓치맨>으로 자신의 정체 증명을 했다. 영화 <왓치맨>은 만화 원작에 매우, 매우, 매우 충실하게 만들어졌는데, 항간에 보니 제작사가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영화로 만들'자는 걸 잭 스나이더가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고 한다. 감독은 영화로 말하는 법이라는데, 나는 이 감독이 <300>에 쏟아졌던 그 온갖 오해에도 불구하고 뚝심있게 그저 다음 영화로 자신의 정체를, 존재를 증명해 버린 것에 대해 존경과 흠모를 바칠 뿐이다. <300>이 미 제국주의와 이라크 침공을 합리화하는 영화라고 굳게 믿으며 불편해하던 분들이 <왓치맨>을 보고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죽겠다. 이분들은 사실 <새벽의 저주>부터 다시 보며 잭 스나이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완전히 뒤집는 힘든 작업을 하셔야 할 듯? 하지만 이것은 <새벽의 저주>부터 그를 지지해온 나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왓치맨>을 계기로 그의 영화들은 다시 한번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왓치맨>을 본 후에도, "잭 스나이더를 알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제껏 그가 연출한 영화 세 편은 모두 원작이 있는 작품들이었고, 그는 자신의 세계관이나 가치를 그렇게 간접적으로만 드러내왔다. 거기에, 단 세 편이다. 다만 그 세 편이 모두 어느 한 쪽으로도 도저히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두 진영의 지옥같은 대립과 전쟁들을 다룬 영화들이라는 점을 조금 되새겨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Watchmen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나?'


아 그래서 <왓치맨>이 어떠냐고?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릴 것 같다. 나는 매우 좋아한 쪽이었다. 사람들이 슈퍼히어로물에서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이 영화는 주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슈퍼히어로물을 보면서 잊거나 숨기고자 했던 주제들을 눈앞에 까발려버린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보며 심지어는 '매우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슈퍼히어로들이 '작전'을 나가 사람들을 구하는 장면이, 소영웅주의에 입각한 '영웅놀이'처럼 보이는데다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짓이고, 나아가 감독이 그들을 놀리는 듯한 뉘앙스까지 깔려있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왜 여자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여자 슈퍼히로인이라고 해야 하려나)가 하위문화에서 포르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영화 초반에 여자 슈퍼히어로 포르노 만화에 대한 농담이 삽입돼 있기도 하다. (이것은 원작에서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영화가 함의하고 있는 사회, 정치적 맥락은 심지어 <엑스맨>에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정치하며 복잡하다. 이 감독, 실은 알고 보니 대단히 지적인 사람이었다 @.@!! 아무리 원작에서 이미 다 다뤘던 주제라곤 해도, 그에 대한 감독의 이해가 떨어진다면 영화에서 이 정도로까지 일관성있게, 체계있게 풀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원작을 안 봤지만 원작을 '아주 잘' 옮겼다는 건 알겠다. 원작이 있는 작품들 특유의, 어딘가 배분이 이상해지고 이야기가 비어있는 듯해 원작을 찾아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래서 러닝타임이 이렇게 길어진 것이겠지만.

영화 속에서 악당과 주인공들이 드디어 맞붙게 됐을 때, 악당은 "야... 내가 무슨 코믹북에서나 나오는 슈퍼악당인 줄 알아?"라는 대사를 친다. (번역자막으로는 아마 '내가 그렇게 시시한 악당이냐?' 정도로 나왔던 듯?) 굉장히 진지한 농담인 셈인데, 맞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대사를 통해 "야... 현실이 그렇게 만만하고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줄 알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영화 속에 깔린 그 정치적인 콘텍스트 - 단순히 닉슨이 3선에 성공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했다는 가상역사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 를 따지고 든다면, 영화의 본격적인 리뷰도 길어질 수밖에 없겠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슈퍼히어로는 본래 민주주의의 적이다. 영화가 까발리는 건 그거다. 거기에 그 슈퍼히어로가 스스로 법의 집행자를 자처하고 나설 때 정치는, 세계는 완전히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슈퍼히어로의 법 집행과 통치에 거기에 박수를 치는 건 파시즘에 대한 동조다. 우리가 허구화된 슈퍼히어로물을 즐기고 있기는 해도 이게 현실에서 절대로 슈퍼히어로를 중심으로 한 정치가 일어나선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이 영화는 설파한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의 슈퍼히어로는 노골적으로 '미 제국주의' 그 자체다. 이건 비유고 뭐고 할 필요없이 눈앞에 직접 보여준다. 그러니 경찰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완전히 풍자되고 야유를 받는 건 당연하다. (이건 감독이 <300>에서도 했던 짓이다. 미국인이 감정이입할 스파르타 놈들은 골빈 머슬에 야만인들이 아니었던가.) 일단 단평은 여기까지.

2009/02/25 13:16 2009/02/25 13:16

발사진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조리개고 셔터스피드고 화밸이고 나발이고 걍 아무렇게나 셔터부터 눌러대는 버릇 때문에 저 모양 저 꼴이다. 뭐 못 찍으니까 강좌도 들으러 다니고 그러는 건데. 실내 시네토크 사진이 없는 건 한번도 참석을 못한 데다가, 안은 너무 어두워서 어차피 이것보다도 개판 오분전으로 나온다능. 아악 언제 돈 벌어서 밝은 렌즈랑 스트로보 사나효. ㅠ.ㅠ

2009/02/24 00:02 2009/02/24 00:02

2009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2009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기자회견


다음은 현재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의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운영하는 친구들영화제 웹데일리 블로그에서 최근 올라온 글로, 얼마 전 '영화의 고전과 미래의 시네마테크'라는 주제로 열린 포럼을 요약한 글이다. 시네마테크를 둘러싼 다양한 고민과 논란을 정리하는 데에 아주 유용한 자료가 될 듯. 총 2개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포스트에서는 해당 글의 링크만 제공한다. 그리 길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일독을 권한다.

포럼 1 : 또다른 친구와 시네마테크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며(새 창으로 열기)
포럼 2 : 시네마테크와 관련한 진전된 문화적 합의가 필요하다(새 창으로 열기)

혹시나 "난 모니터상에서 글 못 읽어요 징징징" 하실 딱 나같은 사람을 위하여 밑에 한글편집본을 걸어둔다. 이건 철저하게 내 취향대로 (폰트, 자간, 줄간, 기타 등등) 편집된 만큼, 불편하면 알아서 고치시든가 말든가...

이 글과 함께 읽으면(그리고 그 글 안에 링크된 글들과 함께 읽으면) 더욱 좋다. : 서울아트시네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새 창으로 열기) 고백하자면 이 글의 내용 구성에 있어 상당부분의 출처는... 말 안 하련다. 당사자분이 밝혀도 된다고 하시면 그때 밝히겠다.

2009/02/23 18:53 2009/02/23 18:53

억울한 역사의 피해자가 있다. 그런데 그는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과 다르다. 불쌍한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아닌, 자기 인생의 주체로 오히려 다른 이들을 끌어나가는 대상이다. 그때의 한과 상처가 너무다 아파 가끔 눈물을 흘리기는 하지만, 그 과거에 종속돼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힘차게 살아나가는 사람, 그렇기에 더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인 사람을 볼 때 과연 당신의 반응이 어떨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가 차마 공론화되지 못했던 상처와 통한을 드러내며 기록하는 영화였다면,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공론화된 그 상처와 통한을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이 영화 속의 주인공 송선도 할머니는 투쟁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갈 뿐 아니라, 놀랍게도 그를 돕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아픔은 물론, 영화를 보고있는 불특정 다수의 상처까지 치유해준다. 이건 송 할머니가 부처님의 미소를 가진 천사표 성인군자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송 할머니가 말하자면 '욕쟁이 할머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제의 그 엄청난 상처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삶을 열심히, 그리고 충실히 살아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돕는 사람들에게 마냥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100% 헌신을 '요구'하는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죄의식에 송구스러워하는 빚진 자들이 아니라 비로소 당당한 '동지'가 된다. 또한 이를 지켜보는 우리 역사 과거 역사의 희생자들을 볼 때 느꼈던 마음의 답답함과 역사에 대한 부담감 대신, 함께 싸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것인지 새삼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는, 우리가 역사의 피해자라는 사람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생각할 때 흔히 생각하는 장면들, 그러니까 억울한 사정의 피해자가 통한을 쏟아내놓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 함께 비통한 마음이 되며 까닭모를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 장면이 없다.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송 할머니의 주장, "두 번 다시 전쟁은 안 된다"는 말이 얼마나 생생한 감동을 주는지, 이 상식적이고도 명료한 주장이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할머니야말로 그 주장의 가장 설득력있는 '산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제목이 진정 무슨 의미인지, 얼마나, 얼마나 감동스러운 문장인지 새삼 느끼실 수 있게 되실 것이다. 오늘은 '리뷰어'의 입장에서 한 발짝 살짝 나가서 기꺼이 이 영화를 위한 '삐끼'가 되겠다. 개인적으로는, <워낭소리>보다 훨씬 재밌고 즐겁고 감동적으로 본 다큐멘터리였다. (나 변태 아니라능. 정말로 영화가 재밌고 즐겁고 감동적이라능.) 꼭 한번 이 영화를 보시기를. 2월 26일 인디스페이스, 미로스페이스, 시네마상상마당 등에서 개봉.

2009/02/22 12:58 2009/02/22 12:58

애초 이 영화가 그토록 회자된 것도 대런 아르토프스키나 마리사 토메이나 내용이나 소재 기타 등등 모두 다 제낀 채 오로지 '미키 루크' 때문이었다. 그래서 딱 그걸로만 말하자면.

맙소사, 눈물이 난다. 미치도록 눈물난다.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이 무식하고 육중하고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경멸스러운 이 사내가, 미치도록 안쓰럽고 눈물난다. 그리고 거기에 실제 미키 루크의 삶이 겹친다. 그러다보니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결코 이해할 마음도 없었을 이 사내의 그 주름지고 얼룩덜룩한 인생에 다시 한번 눈이 가고, 마음이 간다. 나아가 그는 내가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종종 악몽 속에서 보았던 나의 루저로서의 미래를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내고 있었다. 머리에 뭐 좀 든 인간이라면 다들 암흑기로 기억할 레이건의 80년대를 그리워하고, 철지난 그 시대의 헤비메탈과 디스코를 틀어놓고 "이게 진짜 음악"이라고 중얼거리는 이 촌스런 사내, 그 몸 구석구석에 새겨진, 저마다의 사연과 인생을 기억하고 있을 상처가, 온몸으로 흘려대던 피가, 아무리 참고 또 참으려고 해도 누선을 쑤셔댄다.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딸래미조차 벌레보듯 하는 이 실패한 인생의 사내가, 결코 동정할 마음이 없는데도, 그 모든 게 자업자득이라는 걸 나도 알고 심지어 그 자신도 아는데도, 그런데도 아프고 안쓰럽다. 심지어 마지막 링 위에서의 그는 마치 제왕같다.

결코 그를 사랑하게 되었노라 말할 순 없지만, 실패로 얼룩져 과거의 영광만을 그리워하는 그의 삶이 결코 후지다고, 더럽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 모든 과거의 영광도, 지금의 오욕도, 모두 오롯이 그의 것. 이 세상 모든 루저와 실패자와 패배자들을 위한, 찬가도 아닌, 마지막 장송곡. 그게 바로 <더 레슬러>다. 그의 연기에 대한 그 모든 찬사에 그저 묵묵히 동의할 뿐이다. 그 모든 게 '진짜'임을, 분명히 알겠다.


ps. 2/21 4:24am 추가 : <록키 발보아>(새 창으로 열기)와 비교할 것.

2009/02/20 18:59 2009/02/20 18:59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박용우는 자신이 맡은 역에 대해 '감정노동자'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도시에서 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정노동자가 아닐까, 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감정노동자에 해당하는 바로 그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도시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직군이 낮고 밑바닥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하고 싶다. 그렇게 본다면 '장르영화적 재미'를 기대하고 본 관객에겐 썰렁하고 낯선 이 영화, 실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계급전쟁에 대한 영화라 할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 그랬던 것처럼.) 연예인이라는 자산을 (일시적으로나마) 소유한 소자본가와, 가진 건 몸뚱이에 심지어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최소한으로나마 존중받을 권리마저 임노동에 저당잡혀버린, 우리 시대 새로운 최하층 노동자인 서비스업 종사자의 극대극 대결. 게다가 이들을 둘러싼 각종 첨단 통신기기들, 특히 '핸드폰'의 주요기능과 부기능이 개발해준 일련의 새로운 환경들은, 천박한 자본주의적 욕망이 꾸물대는 이 서울, 멀쩡한 사람들마저 분노 발작으로 또라이와 미친년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는 이 서울이라는 저주받을 도시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어떤 다른 영화들도 감히 따라오지 못할 만큼 생생하게 까발리고 있는 셈이다. 혹자들은 이 영화의 '지나친 PPL'에 눈쌀을 찌푸리기도 하지만, 글쎄, E마트야말로 대형화, 기업화가 가속화되고, 유통이 콘텐츠의 질마저 결정해버리는 이 기형적인 자본주의의 심장 서울을 드러내는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상징적이고,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 아닌가. E마트야 이 영화에 자기네 이름을 대거 노출시키게 됐다고 좋아했겠지만, 감독은 이 E마트야말로 우리의 더러운 욕망의 집합체이자 이것이 체계적으로 어떻게 착취되고 관리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시스템의 대표명사로 사용해 버렸다. (자본주의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일반적이면서도 꽤나 영리하고 효과도 높은 방식이라 해야 할까.) 그리고 이 공간의 '고객관리팀'에 일하는 감정노동자야말로, 그 시스템 안에서 이미 분노 바이러스에 단단히 감염된 좀비들의 분노 배설구로서 좀비 흉내조차 내지 못 하고 다른 좀비들에게조차 착취되는 최하층 좀비들인 셈이다. 그러니까 박용우가 우는 장면에서 실소를 터뜨린 관객들이라면, 대체로 조직 내에서의 밥벌이의 더러움과 서러움, 특히 3D나 비정규직, 혹은 알바인생의 피맺힌 한을 아직 채 못 겪었을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난 도저히 못 웃겠던데... 오히려 눈물이 나던데.


그렇다면 김한민 감독은 이런 사회고발적 성격을 애초에 의도하고 영화에 공을 들여 집어넣은 걸까, 그저 이야기에 치중하다 보니 소 뒷걸음치다 쥐잡은 격일까. 나는 전자라고 생각한다. 전작 <극락도 살인사건>에서도 그는 거대 제약기업(우리 실제 현실에서 이는 대부분 재벌에 속해있다)의 탐욕에 의한 착취라는 코드를 슬쩍 집어넣은 바 있다. 다만 <극락도 살인사건>이 장르영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충실하며 그 코드를 감추려 애썼다면, 그 영화에서의 성공에 자신감이 붙어서인지 <핸드폰>에선 좀더 노골적으로, 때로는 촌스럽게 직접 드러내는 부분이 많아졌다는 것인데, 영화의 아쉬운 부분은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직설법으로 소통의 도구는 발달했으나 정작 소통의 방식은 후퇴한 아이러니나 감정노동자가 당하는 착취의 부분을 고발하면서도 이에 대한 내용은 다소 붕뜬 면이 있으며, 이것이 다시 장르영화로서의 미덕과 살짝 겉도는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극락도 살인사건>에서도 그랬지만 인간에 대해 애초 전제돼버린 냉소, 그로 인한 무자비한 피범벅의 역겨움이 여전히 매니악하게 드러나 버린다. (님하 호러 코드는 그리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게 아니라능. 그런데 두 영화 다 스릴러로 시작해 호러로 맺다니, 댁도 고집 좀 센 사람이겠다능.)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2시간 20분이나 된다는 걸 극장에서 나와 시계를 보고서야 알았고, 이 정도면 사회고발 영화로서 충분히 점수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좀더 지적인 내공이 있었다면 영화도 한결 세련돼지면서 더욱 엣지해졌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지만은... 뭐 아직 젊은 감독이니까... 평자들 사이에서 평이 엇갈리는 것도 바로 이 지점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영화를 '읽는' 사람들이 이 부분을 충분히 제시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ps. 그런데... 이런 영화를 보고나오는 와중에 사람이 너무 많아 정체되는 걸 '빨리 가라고' 밀치는 간이 배밖에 나온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겁이 없는 작자들인지 모르겠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그렇게 밀침을 당하고 넘어질 뻔하는 와중 새치기까지 당한 뒤에, 새삼스레 엄태웅에게 잔혹하게 복수하는 박용우로 나도 변신할 뻔했다능. 가뜩이나 분노 바이러스를 잔뜩 자극받고, 그럼에도 그거 함부로 분출하면 안 되겠다 교훈을 얻고 나온 직후에...

ps2. 제일 놀란 건 역시 박용우였는데, 이 사람... 어째 주연급 된지 오래인데도 본인이 조연급 캐릭터에 더 만족하는 것 같아. <원스 어폰 어 타임> 때도 '자뻑 장면'에서 영 스스로 민망해하는 것 같더니만. 하여간 이 사람의 필모그래피를 보다보니, 참 재밌는 행보를 가고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ps3. 2월 19일 목요일 오후 3시, 추가 : 이 영화에서 영상통화니 녹음이니 하는 핸드폰의 각종 부가기능들을 척척 사용하는 주인공들이 조금 경이로웠고, 20대 때만 해도 새로운 기계들의 기본적인 기능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어른들을 살짝 비웃은 적도 있었는데,... 방금, 30분간에 걸친 중요 통화를 하면서 그 전에 녹음 기능을 분명 확인했음에도, 통화 끊고 보니 전혀 녹음이 안 된 것을 발견... 나 녹음되는 거 믿고 메모도 안 했단 말이다! ㅠ.ㅠ

2009/02/18 23:57 2009/02/18 23:57

각종 매체들 중 이 문제를 제일 먼저 보도한 건 프레시안. 물론 이런 걸로는 절대로 특종하고 싶지 않다. 지난 주 들었던 가장 암울한 소식 중 하나. 고작해야 지원사업 하나를 공모제로 전환한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공적자금을 들이는 사업인데 공모제가 맞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사업이 영진위 거여서 사업비고 인건비고 다 영진위에서 나가는 사업이었다면 공모제가 맞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게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

애초에 시네마테크 사업은 영진위가 주도해온 사업이 아니라, 철저히 민간에서 운동으로 시작해 해온 사업이다. 다양한 시네마테크들이 전용관을 세우고 여기서 안정적인 프로그램을 돌릴 필요성을 느껴 연합체를 만들고 탄생시킨 공간이 바로 서울아트시네마다. 이 공간의 공공성에 동의한 영진위가 위탁의 형태로 이제껏 전체 예산의 고작 30% 정도를 지원해준 것에 불과하다. 그런 상황에서 시네마테크 전용관 지원사업을 공모제로 하겠다고 나서는 건, 이 사업을 영진위 주체로 가져가면서 그간 이 활동을 해온 주체들을 공공기관의 하위로 두겠다는 말이기도 하고, 국가의 돈으로 이 사업 자체를 좌지우지하겠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제껏 전액을 지원해오며 사업을 주도해 왔다면 다른 문제겠지만, 사업 자체가 영진위 사업이 아니었던 데다 고작 30%를 지원해온 상황이라면 부당할 수밖에 없는 처사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건물 임대료 조금 보태주던 사람이 내 사업을 통으로 먹겠다고 건물주인 행세를 하며 나서는 꼴이라 해야 할까.

거기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덧붙여 질문할 수 있다. 과연 시네마테크 사업에 공모제가 어울리는가 하는 것이다. 시네마테크 사업이란 게 그저 때 되면 대충 영화 몇 편 모아서 트는 걸로 보이시는가? 시네마테크를 '영화의 도서관'이라고 말들을 한다. 가장 중요한 기능이 교육적 기능이고, 그렇기에 '비영리 공공성'으로 운영되는 거다. 기본적으로 자료를 수집, 분류하고 보관하며, 보수하면서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선을 보일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야 하며, 그러러면 계속해서 약 2주에서 3주 간격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의 기획전을 1년 내내 계속 돌릴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이를 통해 부가적으로 지역 주민과의 소통과 공공 문화사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걸 할 수 있는 역량이란 이벤트성으로 어쩌다 한번 기획전 하는 정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매우 특수하고 전문적인 분야의 일이고 규모도 방대하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는, 프로그래밍에 있어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관의 간섭을 받지 않을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정부가 정작 규제가 필요한 대기업 독점 사업들에는 각종 특혜와 규제 완화를 베풀어주면서 정작 민간의 자율에 맡겨야 할 사업에는 공공기관이 개입해서 날로 먹어 좌지우지하려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작 공공화를 지켜야 할 수도, 가스, 전기, 철도에 대해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민영화(라고 쓰고 '사영화'로 읽어야 한다) 얘기를 던지면서, 민간에서 멀쩡하게 잘 해오고 있던 사업을 이런 식으로 관이 개입하고 간섭하려 하는 것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시네마테크에 대한 논쟁과 토론을 보다 한 차원 끌어올려 진행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문제의 발언을 쏟아낸 그 세미나 자리에서, 강한섭 위원장은 "과거를 철저히 단절시킨 채 뿌리도 없이 아무 기반과 맥락도 없이 무작정 미래의 상을 끌어와 현실에 접목시키려 했다"며 과거 영진위 구성원들을 비판한 바 있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일정부분 동의하는 부분이 있고, 그래서 고쳐져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랬던 강한섭 위원장이 정작 시네마테크를 만들어온 사람들의 10년 노력은 깡그리 무시한 채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허허벌판에서 대단히 새로운 걸 시작하는 양 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는 또 어떻게 봐야 할까. 설사 공모제가 '일단' 철회된다 하더라도, 안심하지 말고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깊게 고민하고 논의가 오가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공공성과 민간의 자율성, 그리고 공적 지금 자원이라는 것이 복잡하게 얽힌 이상,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관의 일방적인 통고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논의와 토론이 필요하다. 우리가 계속 시네마테크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ps. 한겨레 기사의 문제 : '다양성  영화'라는 말을 사용한 건 지금 영진위가 아니라 이전 영진위에 의해서다. 이전 영진위는 '다양성 영화'와 '독립영화'란 말을 동시에 사용했으며 전자를 후자의 상위 개념으로 사용했다. 현재 영진위가 '독립영화'란 말을 없애려는 건 독립영화 제작지원 제도라는 멍칭을 '단편, 중편, 다큐멘터리 제작지원 제도'로 바꾸면서 독립장편 영화를 '한국영화 제작지원' 제도에 편입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ps2. 아울러 여러 기사들에서 쓴 바, 올해 들어 폐지됐다는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내지 '독립영화 개봉지원' 제도의 원래 정식 명칭은 '아트플러스 시네마네트워크 개봉지원' 제도다. 2006년에 '다양성영화 개봉지원'에서 '아트플러스 시네마네트워크 개봉지원' 제도로 정식 명칭이 바뀌었다. 독립영화계에서 이전의 습관에 따라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독립영화 개봉지원'이라 말한 것을 기자들이 그대로 받아쓴 듯하다.

2009/02/17 18:29 2009/02/17 18:29

조나단 드미가 이런 식으로 귀환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살짝 충격이었다. 90년대 뉴욕 독립영화 스타일이잖아. 그때 뉴욕 독립영화들의 스타일이란 것도 꽤나 다양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꽤 전형적이다. 좀 거칠고 투박하고, 일부러 헨드헬드 카메라 많이 써서 많이 흔들리고 그래서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고, 심지어 음악도 따로 밖에서 입힌 거 없이 다 화면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연주할 때 나오는 곡들 뿐이고, 화면 입자도 좀 거친 것 같은, 대신 주인공한테 카메라가 아주 가까이 밀착해 들어가며 극클로즈업 화면도 많은, 그리고 이야기 규모는 가족, 혹은 딱 몇 명으로 한정된 아주 작은 영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낡았다는 건 아니고, 영화는 꽤 감동적이었다.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이가 또한 그 가족의 일부라면, 그 봉인된 과거를 과연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 그를 향한 애증의 울타리 사이에서 대체 어떡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또 상처를 가한 이는 그 치명적인 죄책감과, 그럼에도, 가족에게서까지 미움받고 내쳐지지고 싶지는 않아 절박하게 매달리는 심정, 사이에서 헤매게 되고, 또 그런 이들이 가족 경사를 맞아 잠시나마 함께 지내며 서로 애정을 표하면서도 또 부딪히고, 상처주고 상처받고, 또 죄책감을 느끼고, 하는 그 세세한 과정들을... 조나단 드미는 카메라를 매우 가까이 배우들에게 가져다 대면서도, 정작 감독 자신은 그들에게 섣불리 개입하지 않은 채 그들 내면의 그 심리를 누구에게도 치우침없이 조근조근 풀어낸다.

대체 얼마나 잘했나 궁금증을 일으킬 정도로 미국에선 앤 헤서웨이의 연기에 대해 호들갑을 떨어댔는데, 보고나니 그럴 만했구나 싶다. 잘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틴에이지용 로맨틱 코미디로 시작해 20대용 로맨틱 코미디를 하던 예쁘장하고 팬시한 여배우가 다른 연기도 곧잘 한다는 걸 증명했을 때 격려하는 차원에서 더 박수를 보내는, 그런 종류의 찬사도 덧붙여진 듯. 언제나 이 배우 얼굴이 참 재미있게 생겼다고 생각했고, 그 지나치게 큰 눈 때문에 팬시한 로맨틱 코미디 여주인공 외에 다른 역을 맡는 게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잘해내더라. 그럼에도 역시 인형 같은 분위기가 나는 건 사실이기도 하고. 극중에서 "재활원에서 살이 쪘다"는 대사를 다섯 번 정도는 하는 것 같던데, 그래서 일부러 살을 찌운 것도 같고, 또 원래 기자와 평론가들이란 배우가 일부러 살을 찌우거나 빼거나 혹은 다른 식으로 외모에 소위 손상을 가하거나 하면 급 호감을 나타내며 또 가산점을 주는 버릇들이 있기 때문에. 앤 헤서웨이의 언니로 나온 로즈마리 드윗과 아버지 역으로 나온 빌 어윈 연기도 좋았고, 오랜만에 얼굴을 본 데보라 윙어도 무지 반가웠다. 이제 많이 늙긴 했지만 아이고 그래도 여전히 고우시더란.

Rachel Getting Married

2009/02/14 00:57 2009/02/14 00:57

한줄평 : 베티 프리단의 역저 [여성의 신비(새 창으로 열기)]가 나온 배경을 생생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중산층'이란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단순히 사회계층을 지칭하는 것 이상이다. 포디즘(포드주의)이 정점을 찍으면서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소비의 증가를 통해 노동자들이 중산층으로 안정을 누렸던 시기는 포디즘이 처음 등장한 1910년대가 아니라 1950년대에서 60년대였다. 그러나 이 때가 과연 행복한 시대였냐 하면, 그건 아니다. 재즈의 시대(Jazz Age : 1920년에서 1929년까지, 혹은 세계1차 대전 직후부터 뉴욕 증시 폭락까지)에 반짝 등장했다가 대공황과 전쟁으로 잠시 유예됐던 물질주의와 소비 향락 속에서 중산층은 안정과 함께 권태와 무력감을, 그리고 지리멸렬한 자기혐오 등을 경험하게 된다. 자본과 물질과 소비에 대한 정신의 패배, 라고 해야 할까. 이를 풍자한 조지 로메로 감독의 좀비 3부작, 그러니까 <리빙 데드> 혹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X> 시리즈의 첫 작품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처음 나온 게 바로 이 영화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해로부터 13년 후인 1968년이다. 참고로 미국의 50년대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고르라면 '매카시즘'이 될 것이다. 매카시 광풍은, 또 한편으로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 중산층 혹은 그 위로 계급이동을 하기 위해 소위 애국심을 무기로 기존의 기득권자들에게 도전했고 이를 일정 정도 성취했다는 측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특히 이 시기는 소위 '현모양처'로서 가정에만 충실하던, 그러나 제대로 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수많은 중산층의 여성들이 이유없는 무력감과 우울증, 히스테리를 호소하던 때였다. 물론 당시는 이것이 그저 개인의 특성처럼 치부되었지만, 이 현상을 연구하던 한 심리학자는 이것이 그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중산층 여성 일반에게 나타나는 대단히 공통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임을 밝혀내는데, 그 학자가 바로 베티 프리단이고 그 연구의 결과서가 바로 미국에서 제2의 페미니즘 운동을 일으켰다고 평가받는 [여성의 신비]다. 그리고 이 시기의 불안하고 어두운 면들을 속속들이 잡아내고 묘사해낸 영화가 바로 <레볼루셔너리 로드>다. 영화 안에서 이 작품의 배경이 1955년이라고 명시되고 있기도 하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사랑에 빠져 결혼한 프랭크(리어나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이 교외에서 살며 지리멸렬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둘이 처음 만나던 순간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만남과 사랑, 결혼 등에 관해 별다른 시간 할애 없이 곧장 아이 둘 낳고 살고 있는 7년 후를 보여주며, 이들의 과거는 간간히, 극히 짧은 대사나 플래시백으로만 제시될 뿐이다. 적당히 바람을 피우거나 성질을 내며 싸우는 이 부부가 연애 시절의 불꽃을 되찾는 것은 파리행을 결심하고서다. 에이프릴의 열정적인 제안에 설득당한 프랭크는 에이프릴과 함께 잠시잠깐의 행복과 혼연일체감을 느끼는데, 이들의 짧은 행복은 승진을 제안받은 프랭크의 망설임과 에이프릴의 임신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프랭크는 에이프릴의 임신을 '무기'로 사용하며 파리행을 포기할 것을 에이프릴에게 설득하고, 심지어 에이프릴을 비난하며, 그들이 함께 꾸었던 꿈을 삽시간에 짓밟는다. 낙태를 고려하는 그녀를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모는 심중엔, 정말로 생명에 대한 배려가 있다기보다는 물질적 성공과 사회적 출세에 대한 욕망과, 그녀를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모든 윤리적, 도덕적 판단과 그에 대한 책임까지도 에이프릴에게 미루는 비겁한 면모를 보이면서까지 그가 지키고 싶었던 자존심과 권위란,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당시에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이었을 것이다.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란, 남자들에겐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지켜야 할 신성한 무엇이다. 여자가 아름다움과 사랑받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든다면, 남자는 가족을 부양하는 경제력과 가장으로서의 권위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그것이, 오랫동안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통제되던 사회에서 일반적인 남녀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몇 가지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아내를 사랑하는 좋은 남편이라 스스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시하는 에이프릴에게서 정말로 상처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지금의 눈으로 프랭크를 일방적으로 손쉽게 비난하기보다, 당시의 기준을 고려해 프랭크의 심리를 추측해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프랭크는 여전히 속물적이고 비겁하고 나쁜 놈이긴 하지만.

Revolutionary Road

지나치게 과시적이라 짧게 끝날 수밖에 없는 부부간 행복과 일체감.

중산층의 이런 신기루같은 일상은 두 부부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건 아니다. 다른 이에게 호들갑스럽게 친절하고 소위 교양있는 젊은 부부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내며 남편을 휘두르는 헬렌(캐시 베이츠의 놀라운 연기!)은 실제로 남편에게 무시를 받으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병 때문에 '현모양처로서의 실패감'을 컴플렉스로 안고 살아간다. 프랭크-에이프릴 부부와 친구로 나오는 셰프-밀리 부부 역시 겉으로 금슬좋고 평화롭지만 공허한 가족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건 마찬가지. 밀리는 남편도 자유를 꿈꾸며 자신을 낯선 세계로 데려가려 할까 봐 겁을 내고, 그러면서도 남편의 눈치를 보기에 바쁘고, 셰프는 자신의 꿈과 소망을 속으로만 은밀히 판타지로 남겨둔다.

아마도 영화를 보는 이의 성별에 따라 아마도 감정이입의 대상이 다를 것이다. 샘 멘데스 감독은 프랭크(리어나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 둘의 꿈과 사랑과 갈등과 대립을 묘사해 내는 듯하다. (남자 관객의 반응을 듣고 싶다.) 여자 관객인데다 삼십대 중반이 되도록 여전히 소위 '철없이' 살고있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에이프릴에 전적으로 감정이입해서 보았고, 에이프릴의 꿈과 희망이 다소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은 십분 인정하더라도, 그녀에게 파리가 구체적인 지명이라기보다는 중산층의 현모양처라는, 그 보이지 않는 유리벽의 갑갑한 굴레를 벗어나 도달하고픈 곳의 일종의 '상징'이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 직설법 대사로도 드러나 버리기는 하지만. 이후 그녀를 집에 잡아두려는 프랭크의 설득과 위협이 과연 어떻게 에이프릴을 '정신병자'로 만드는가. 그 패턴은, 베티 프리단이 연구했던 주제를 그대로 눈앞에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결국 에이프릴이 선택한 위험한 행동 역시,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격렬하게 외쳤던 권리와도 명백한 연관이 있다. 

둘이 직접 맞붙어 (원래대로라면) 불꽃같은 전쟁을 벌이는 장면도 나오는데, 케이트 윈슬렛의 포스에 못 미치는 리어나도 디카프리오 연기가 좀 안타깝다. 케이트 윈슬렛은 역시, 가슴 속에 불꽃을 안고 살아가며 시대와, 혹은 주변과 불화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 가장 빛나고 에너제틱하다. 사실 데뷔작 <천상의 피조물들>부터 그녀가 맡았던 역은 거의 언제나 그랬다. 심지어 <센스, 센서빌리티>에서도 그녀의 마리앤은 '여염집 규수'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조신한 행동거지 대신, 사랑하고 느끼는 대로 거침없이 행동하는 캐릭터이지 않는가. 겉모습은 단아한 옷차림의 중산층 주부지만 가슴 속에 천불을 안고 사는 열정적인 에이프릴은 케이트 윈슬렛에게 그야말로 적역의 캐릭터다. 반면 '두 딸을 거느린 아버지' 리어나도 디카프리오는 어쩐지... 좀...

샘 멘데스의 연출은, 아무래도 그가 연극연출가로서 더 명망이 높다는 사실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장면 장면이 어쩐지 대단히 연극적으로 보인다. 심지어 거실과 식당을 유려하고 요란하게(...) 그리고 컷 없이 오가는 카메라 워킹에서도, 나는 어쩐지 프로시니엄 아치를 벗어나지 못 하는 갑갑함을 많이 느꼈다. 이건 한편으로는, '중산층의 집' 안에 갇힌 주인공들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더없이 어울리는 연출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영화로서의 미덕이나 장점이 상당 부분 무시되는 듯한 느낌이기도 해서 뒷맛이 개운하지도 못 하다. 연극을 그대로 영화로 옮겨온 듯한 느낌이 드는 수많은 영화들, 예컨대 최근에 본 <다우트>의 경우에도 그런 연극적인 특징들이 개운치 못 하다거나 답답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느껴지진 않았는데, <아메리칸 뷰티>에서도 그랬지만 샘 멘데스의 연출엔 어딘가 모르게 사람 참 깝깝하게 만드는, 그리고 인공적으로 갈등이 압축된 듯한 느낌이 좀 있다. 하지만 이건 <로드 투 퍼디션>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지어 말하기에는 좀 위험한 점이긴 하고...

그런데 이 영화가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에 대한 굉장한 해설서 기능을 하기는 하지만, 역시 만든 이가 남자라는 점은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에이프릴의 열정을 이해하거나 존중하는 사람들은 어째 모두 남자들뿐이란 게, 내게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만든 감독 입장에서는 전혀 어색하거나 걸리는 점이 없었을 듯.

(근데 무슨 단평이 이리 기냐능? ㅋㅋ)

2009/02/13 03:26 2009/02/13 03:26

정치, 사회적 빈곤함이 문화적 빈곤함을 확대시키고 있는 와중에, 이 기사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새 창으로 열기)는 그저 신호탄에 불과하다. 그저 영화 한 분야를 다루고 있을 뿐, 이미 다른 영역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 한 편이 개봉됐을 때 과연 그 영화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게 반영돼 있는지, 그 가치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 그 영화의 흥행수익이 자동차 몇 대, 컴퓨터 몇 대를 판 것과 같냐를 따지는 세상이 된지는 오래됐다. 지금 문화관광부에서도, 심지어 청와대에서도 <워낭소리> 보고 싶다고 프로듀서에게 전화가 오는 상황이지만, 과연 <워낭소리>가 30만 흥행을 하고 그렇게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이 그런 영화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이나 썼을까? 제작비 대비 얼마를 뽑았다더라, 하는 얘기는 영화도 산업인 이상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 경우 산업계에서 종사를 했던 만큼 산업적 부분을 신경쓰지 않는 소위 '예술지상주의자'들을 한심하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영화는, 산업인 동시에 문화다. 문화란 눈에 보이는 숫자의 성과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가 무엇인지 함께 고려해야 할 영역이다.

지금 충무로의 수많은 제작자와 감독들이 과거 독립영화를 만들었다. 지금의 독립영화 감독이 내일의 최고의 감독, 제작자가 될 수 있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더라도, 독립영화는 독립영화로서 이미 그 가치를 가진다. 남들이 듣고싶어하는 얘기만이 아니라, 남들이 모르거나 듣고싶지 않아 했던 이야기마저 용감하게 할 수 있는 게 바로 독립영화다. 그런 만큼 독립영화는 충무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나 헐리웃을 통해 한국에 들어오는 수많은 외화들보다도 오히려 중요하다. 그 중요한 영화들의 발판이 지금 위험에 빠져있다.

기사가 무지 길다. 영화 '정책'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재미있는 기사도 아니다. 일반관객들이 즐겨찾는 흥행영화가 아니라 독립영화에 관한 이야기라 더하다. 하지만 최근 내가 쓴 영화기사 중 가장 중요한 기사가 아닌가 싶다. 꼭 읽어주시기 바란다. 후속기사도 기획중이다.

2009/02/12 16:14 2009/02/12 16:14

사랑에 빠져 결혼한 신혼부부가 우연히 개를 키우게 된다. 그런데 이 개가 또 유독 지독스럽게 말썽과 사고만 치는 개다. 도저히 적응 안 되는 이 개한테 그래도 정 붙인답시고 온갖 고생을 다 하는 와중에 부부는 수많은 일을 겪는다. 아이를 사산하기도 하고, 진로를 바꾸고, 직장을 옮기고, 임신에 성공해 아이를 낳고, 또 낳고, 실수로 하나를 더 낳고, 이사도 한다. 그렇게 서로 나이를 먹어가며 '가정'을 이루고, 함께 살아가고,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이야기. 그리고 사람보다 빨리 늙는 개를 보내며, 죽음도 함께 하는 가족의 이야기다. 

<말리와 나>는 그렇게 제니와 존 부부가 세 아이를 낳고 기르고 나이가 들어가는 아웅다웅 살아가는 일상을 '개 키우기'라는 소재를 통해 펼쳐놓는 얘기다. 말썽쟁이 개 때문에 벌어지는 코믹한 에피소드는 주로 영화의 전반부에 포진돼 있고, 그 사이사이 부부의 일상사가 끼어들더니, 어느새 부부의 가족 이야기가 전부를 차지한다. 하긴, 그게 맞을 것이다. 이들의 말썽쟁이 개, 말리는 그저 개가 아니라 함께 지낸 시간이 쌓일수록 점차 이들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어가니까 말이다. 때로 힘들고 어려워 화를 내고 싸우고 울고 하더라도, 이들은 '가족'이기에 어려운 시간을 함께 도우며 헤쳐나간다. 그래, 결국 '가족' 이야기고,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이다. 다만 유머감각과 글줄 쓰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손에 의해 맛깔나는 이야기로 씌여졌다가, 솜씨 좋은 감독의 손에서 다채로운 희로애락의 삶의 빛깔을 가진, 재미있고 웃기며 찡한 '영화'가 됐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함께 시간을 견디어 가며 나이를 먹고 서로 성숙해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그것이, 여신보다는 이웃집 소녀 같았던, 그리고 이제 우리처럼 얼굴에 주름살을 하나둘 새긴 제니퍼 애니스톤과, 불미스런 사건 이후 한결 순하고 차분해진 표정으로 돌아온 오언 윌슨의 모습이어서 더욱. 그들을 개인적으로 아는 게 아닌데도, 어쩐지 역경과 시련을 헤치고 함께 시간을 지나온, 함께 나이를 먹고있는 동지와 같은 느낌이 든달까. 영화의 마지막 엔딩에서 동물을 전혀 키워본 적이 없는 나도 눈물이 찔끔, 났다. 아마도 동물을 키워봤고, 특히 죽음을 겪었던 이들이라면 이 영화가 더욱 남다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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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동물을 키워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길에서 유기견이나 유기묘를 봤을 때 반응이 다르다. 예컨대, 몇 년 전에 알던 어떤 사람은 자기 아파트 근처에서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해 며칠 음식을 챙겨 갖다주더니, 그예 새끼묘 한 마리는 집에 가져가고, 자기 직장 동료들에게 말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 사람들에게 나머지 새끼묘들을 키우도록 나눠주었다. 그는 이미 당시에 한국에도 출판된 [말리와 나]를 읽으며 펑펑 울곤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우연히 길에서 상처입은 유기견을 발견하곤 일단 병원에 데려가 치료부터 받게 한 후 집으로 데려갔다. 자신이 키울 처지는 아니었기에, 열심히 주변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개를 맡아줄 사람을 찾아냈다. 내게는 그런 감정이나 행동이 경이로운 종류의 것이다. 만약 내가 조그마한 아이들이 꼬물락대는 걸 봤다면 안됐다 여기기는 해도 음식을 챙겨다 줄 생각까지는 아예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런 불쌍한 동물 자체가 내 눈엔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저 지인들의 행동을 목격한 이후 동물에게 관심을 아주 조금 갖게 된 게 변화라면 변화일까. 결국 그런 감정도 '학습'을 통해 배우고 고양이 가능한 듯하다. 물론 확실히 배우기 위해서는 결정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이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싸이코패스라 부르는 사람들 중 일부도 실은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감정을 배울 기회가 아예 없었던 건지도, 어쩌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2009/02/11 10:28 2009/02/11 10:28

<문 프린세스 : 문에이커의 비밀>은 여러 모로 <판의 미로>와 닮은 구석이 있다. 어린 소녀가 부모 중 한쪽 혹은 양쪽을 잃고 새로운 환경으로 이사하여 부적응의 기간을 갖는다. 우연히 낯선 이의 '미션'을 받고 그녀는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곧 그 미션의 모험에 임하게 되며, 결국 자신을 희생해 미션을 수행하며 다른 이의 목숨을, 혹은 세계를 구한다. 특히 이들은 '달'의 정기를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달 부분을 제외하고 이는 실은 훝한 영웅신화 및 이의 변용인 판타지 소설들의 모범 플롯이기도 한데, 우리나라 바리데기 설화에서도 드러나듯 주인공이 소녀인 경우 '희생'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문 프린세스 : 문에이커의 비밀>이 <판의 미로>를 닮았다기보다는, 두 작품 모두 전통적인 판타지 플롯(이것은 다시 영웅신화의 플롯의 변형이다)을 따르는 데에서 공통점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 1947년 영국에서 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를 만들었던 가버 추보가 연출을 맡았는데, 극장에 걸리는 둥 마는 둥 하고 사라졌던 이 영화는 뒤늦게 작품을 본 팬들에 의해 양 엄지 모두 치켜올린 평을 받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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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 프린세스 : 문에이커의 비밀>은 다소 실망스럽다. <황금나침반>에서도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소녀를 연기했던 다코타 블루 리처즈는 이 영화에서 단조롭고 뻣뻣하기 짝이 없는 연기를 보여주며, 영화의 리듬은 종종 길을 잃은 채 툭툭 끊긴다. 소녀가 마침내 문에이커 영지의 비밀을 알아내기까지, 영화의 전반부가 너무 길고 지루한 반면, 나머지 시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별 성의없이 건성으로 비약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볼 만한 것이라면 주인공 마리아 역을 맡은 다코타 블루 리처즈가 입고 나오는 고전미 가득한 의상과, 오랜만에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나타샤 멕켈흔 정도. 물에 빠진 다코타 양을 업은 유니콘들이 바다에서 유니콘들이 파도를 타고 떼로 달려오는 장면은 이 영화가 야심차게 준비한 '스펙터클 볼거리'겠지만 이야기가 이렇게 툭툭 끊기는 영화에선 오히려 실소를 자아낼 정도. 아쉽다, 소녀가 주인공인 탄탄한 판타지는 과연 언제쯤 나오려나. 개중 <잉크하트>가 그나마 나았던 듯(하지만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소녀보단 그녀의 아버지 브렌든 프레이저가 주인공.)

2009/02/10 12:38 2009/02/10 12:38

설 연휴적 인터뷰한 걸 거의 열흘간에 걸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회사엔 지각출근을 일삼으며 낑낑댄 끝에 드디어 기사 완성. 이 인터뷰는 영화비평웹진 네오이마쥬의 백건영 편집장과 함께 진행한 것으로, 네오이마쥬 버전은 여기(새 창으로 열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날 인터뷰는 다소 어두운 분위기에서 전개됐다. 아무래도 인터뷰를 한 장소가 조명이 적어 어둑해서였을까, 아니면 워낙 몸과 마음이 춥고 고통스러운 시대여서였을까. 그래서 나오는 이야기들도 대체로는, (직접적으로 명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명박 정부와 보다 엄혹해진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해 더욱 암울해진 영화풍경을 주제로 한다.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영화는 사회적 산물이고 영화를 상영하고 보는 행위 역시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고전영화/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고 본다는 것이 '스노브하고 우아한 척하는 사람들'의 행위로 오인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그 어느 곳보다도 사회 현실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곳 중 하나가 이곳, 서울아트시네마이기도 하다. 문화적 빈곤함은 곧 사회적, 정치적 빈곤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서울아트시네마

워낙 광량이 적어 셔터스피드가 긴 바람에 살짝 초점이 나갔다. 결코 좋은 사진이 아니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없어서.


개인적으로 이 인터뷰 기사는 내가 썼던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자랑스러워할 만한 기사들 목록에 포함시킬 수 있다. 물론 나와 백건영 편집장님이 워낙 인터뷰 진행을 잘 해서...는 아니고, 영화가 사회의 산물임을 명확하게 전제하고 있는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폭넓은 식견과 통찰력으로 오히려 인터뷰를 주도해갔기 때문이다. 평소 그렇게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고, 오히려 조용한 목소리로 필요한 말만 해서 씨네토크 같은 데에서 감독들의 놀림을 받기도 했던 그를 이토록 말을 쏟아내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행복'을 말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 인터뷰에 이 답이 있다고 믿는다.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는 불행의 시대를 헤쳐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방점을 '불행'이 아니라 '헤쳐나가'는 데에 찍어야 한다.) 시네마테크 전용관이 백지화돼서 불행한 게 아니라, 불행한 시대이기에 전용관이 백지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터뷰 말대로라면, 우리는 섣불리 절망할 필요도 없고, 절망해서도 안 된다. "영화는 언제나 패배해왔다."는 말이 패배주의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럼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도 들린다. 혹자들은 그의 말에서 '영화' 대신 '민중' 혹은 '노동자'를 넣어도 통하는 말임을 눈치챌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주장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은 처음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글과 모든 일상과 모든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정치 따로, 문화 따로 말을 하는 순간 '일상의 정치'는 사라진 채, 저 견고한 벽 너머 '그들만의 정치'와 그들에게 꼭둑각시가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일상'이 분리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오늘, 이 글을 이렇게 쓴 것은, 저 인터뷰가 혹여 나의 부족한 정리 때문에  오해될까 하는 염려에서다. 혹은 고전영화나 예술영화를 보는 행위 역시 매우 정치적인 행위일 수 있음을 한번쯤은 직설법으로 전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정리된 기사를 읽다보니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당연히 저 인터뷰에서 전제되고 있었던 정치성이 좀더 모호하게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다 내 인터뷰 정리 능력이 떨어져서다. 네오이마쥬 버전과 비교해서 읽으면 그런 면이 보완될 것이라 믿는다.

2009/02/06 19:08 2009/02/06 19:08

어제월요일 밤에 <타이드랜드> 일반시사회에 참석을 하기는 했는데, 일단 시작을 놓쳤고, 앉은 자리가 스피커 때문에 화면이 가려져서, 자포자기하고 그냥 자버렸다. 하여 리뷰도 단평도 아직은 쓰기 어렵고, 그저 반쪽자리 수다나 떨어볼까 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게 화요일이라 요일 표기에 문제가 있었다.)

1. 적어도 내가 확인한 장면들에만 의한다면 <타이드랜드>를 표현할 한 단어는 바로 이것이다, 밑을 긁어보시라.

똘.끼.충.만

도중에 사람들이 나가버리고, 끝나고나서도 여기저기서 한숨과 원망의 짜증이 들린 게 당연했다. 판타지인 줄 알고 애를 데리고 온 부모나 월요일부터 회사에서 퇴근하고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와 피로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자 했던 직장인들에게 이 영화는 거의 악몽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12 몽키스>의 브래드 피트나 <브라질>의 조너선 프라이스한테서 엿보이듯 원래 테리 길리엄 감독한테 똘끼가 좀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작정하고 똘끼를 끝까지 밀어부쳤다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아빠가 애 앞에서 버젓이 마약주사를 준비하고, 그걸 열두어 살짜리 애가 '숙달된 조교'의 손놀림으로 아빠 팔뚝에 놔준다고 생각해보라. 심지어 그애는 편하게 취해있으라고 아버지 팔도 머리 위로 올려주고 옆에 거슬리는 물건도 치워주고 다리도 의자 위로 펴준다. 기겁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정신지체인 성인 남성과 어린 여자아이 사이에 성적인 코드가 묘사된다고 할 때 그걸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애가 보는 앞에서 사람 시체, 그것도 애 아버지의 시체를 박제로 만들기 위해 배에 칼을 꽂는 건?  이 정도면 법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거의 아동학대 수준이지 싶다.

2. 그래서 이 영화가 완성도가 이상한 졸작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과잉'의 측면이 없지 않지만, 내용 자체가 애의 기괴한 현실과 더 기괴한 판타지가 섞여들어가는 내용이고 그걸 표현해내는 수단으로 '과잉의 비주얼'을 선택한 거라면, 그 선택은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이 스타일에는 나름의 일관성과 원칙이 보이고, 보기에 따라서 사람 억장을 무너뜨리게 만들 수도 있다. 반토막만 보고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내가 본 부분들은 이 아이가 아무리 끔찍한 상황에 처했다 한들 그것을 아이다운 천진난만함과 상상력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겐 악몽일지 몰라도 제대로 보살핌받지 못한 데다 사회로부터 격리돼 있는 이 아이에겐 총천연색의 천진난만한 꿈의 세계이자 현실인 셈이다. 이 아이의 현실과 꿈을 우리가 '악몽'으로만 인지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또 다른 편협함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악몽'으로 느낄 수밖에 없으며 이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편협함이야말로 테리 길리엄이 그토록 드러내고자 한 대상, 목적하고자 한 대상일 수도 있다.

Tideland

3.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 성적코드에 대해 말하자면, 이건 정신지체인을 등장시키고 성을 다루는 텍스트들이 응당 주기 마련인 익숙한 그 혐오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그 혐오감을 떠올리며 몸을 떠는 관객들을 멋적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유는 주인공인 여자아이 질라이자 로즈와 정신지체인 딕킨스, 두 당사자들은 너무나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순수하게 발현되는 형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되지않게 어른의 세계로 아이의 세계를 억지 흉내를 내는 형태도 아니다. 이들은 분명 자기 인생의 어른들의 행위를 모방하고는 있지만, 그 행위는 채 사회화된 방식(그러니까 관습을 인지하고 그것을 좇는 방식)이 되지 않은 형태로 자신들의 진심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어린아이의 (덜 억압된) 무의식적 성의 측면과, 성인이지만 정신지체를 겪는 억압된 성의 측면이 충돌하여 어느 한 지점으로 수렴된 형태,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은 형태로 드러나는 측면이 있다.

4. 영화의 분위기가 급반전되는 건 영화의 말미, 기차사고가 나서다. 처음으로 소위 '정상적인' 어른이 등장하면서, 아이의 몸을 한 여신은 비로소 아이로 돌아간다. 여기서 '정상적인 어른'이라 함은, 아이를 보았을 때 당연히 그 아이를 걱정하고 보살필 줄 아는 어른을 말한다. 이 아주머니는 손지갑에서 귤을 꺼내 그냥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까서 건네준다. 아이는 아주머니의 품에 안겨 귤을 먹으면서, 대규모 기차사고로 탈선이 된 그 지옥의 현장에서 비로소 평안을 찾는다. 물론 그래서 앞으로 그 아이의 삶이 비로소 제 궤도를 찾을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5. 제니퍼 틸리와 제프 브릿지스가 각각 아이의 부모로 짧게 출연한다. 주인공을 맡은 조델 펄랜드는 <사일런트 힐>에 나왔던 지금 15살의 소녀인데 연기가 아주 섬뜩할 정도다. 아이의 외모에 아이와 어른의 분위기가 같이 있으면서 너무나 아이스러운 천진함을 그대로 표출하는, 아주 신기한 아이다. 다코타 패닝이나 엘 패닝이 '더없이 사랑스럽고 깜찍한' 분위기로 천재 소리를 들었다면, 이 아이는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외모 안에 그로테스크하고 미스테리한 매력으로 천재 소리를 충분히 들을 만하다.

결론 : 영화 개봉하면 반드시 제대로 다시 보자.

기타 : 미치 컬린의 원작소설(새 창으로 열기)이 국내에 출간돼 있다. 참고로 이 작가는, 홈즈 트리뷰트 소설로 늙고 연약한 홈즈를 등장시켜 홈즈 팬들로부터 어마어마하게 욕을 들어먹은 [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새 창으로 열기)]을 쓴 바로 그 사람이다.

2009/02/05 20:04 2009/02/05 20:04

Highschool Musical 3 - Senior Year

고교 농구챔피언쉽 대회의 결승전 시합, 시즌 마지막 경기 16분을 남겨두고 우리의 주인공 팀은 무려 20점 가까이 뒤져있는 상태다. 잠시 작전타임이 있은 뒤 주인공과 농구팀원들은 뮤지컬 씬을 선보인다. 그런데 이 씬이 재미있다. 이 씬의 안무는 인위적인 춤들이 아니라, 철저하게 농구 시합 와중 선수의 움직임이 음악과 노래에 맞춰 짜여졌다. 소리를 죽인 채 설렁대며 보면 이 씬이 노래부르며 춤추는 씬이라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이들의 움직임은 자연스럽다. 고작해야 마지막 골의 순간, 우리의 주인공을 향해 응원과 다짐을 주고받는 남녀 주인공의 짤막한 이중창이 있을 뿐. 이 장면은 곧 손에 땀을 쥐는 역전극으로 이어진다. 시작부터 사람 눈과 귀를 확 휘어잡는 안무와 노래와 카메라다.

내용이야 미국 고3들의 관심사, 그러니까 졸업파티와 진로와 연애가 다인데, 이걸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엔터테이닝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재주고, 원래 시리즈의 3편임에도 1, 2편(이 두 편은 TV용 영화로 공개됐고, 3편만 극장판이다.)을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도 재주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한동안 면면이 이어지다가 <브링 잇 온> 이후로 맥이 끊기다시피 한 명랑발랄한 틴에이저물의 계보를 아주 상큼하게 다시 이으면서 동시에 "틴에이지물의 진화"라고까지 부를 수 있을 만큼 형식의 면에서 한 단계 도약했다. 일단 오리지널 영화용 뮤지컬이라는 것도 신선할 뿐만 아니라, 쇼 뮤지컬의 전통을 가져오기 위해 극 중 극, 정확히 말하면 영화 속 무대 뮤지컬의 형식을 가져가면서 극 중 인물의 현실 이야기가 극 중 극의 이야기가 되는 만큼 영화와 무대를 자유자재로 교차시키는데, 이는 단순히 영화와 무대를 결합하거나 단순히 병치한 것이 아니라 이 둘의 변증법적 '합'의 형태를 도출해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뮤지컬 공연 / 영화의 오래된 관습, 그러니까 갑자기 멀쩡히 잘 있던 주인공한테 스폿라이트가 비춰지며 말로 해도 되는 걸 굳이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것을 극 중 공연의 장면으로 한정시킨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런 관습을 극 중 극의 형태에는 수용하되 이 영화 자체에선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들은 모두 이들의 공연 '연습' 장면으로 화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뮤지컬 관습에 대한 재미있는 농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일정 정도 메타-뮤지컬의 성격까지도 드러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애초 이 배우들이 1편에 캐스팅될 때는 대부분 10대들이었다는데, 고작 그 나이의 아이들이 그런 예쁜 외모들을 가진 주제에 심지어 이 정도의 쇼맨쉽과 노래, 춤, 연기를 소화할 수 있다는 것도 쇼 엔터테인먼트가 상당한 정도로 숙성한 문화에서만 나올 수 있는 상당한 공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브로드웨이의 전통을 적극 수용한 헐리웃에서만 나올 수 있는 고도의 엔터테이닝 쇼인 셈이다. 배우들 하나하나가 나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어린 나이에 너무 뛰어나다. 특히 주인공 트로이 역의 잭 에프런, 요놈 아주 물건이다. 이쁘고 잘생기고 몸매좋은 놈이 노래도 춤도 잘 하고 연기까지 잘 하면 대체. <헤어스프레이>에서 링크 역으로 나왔던 그 예쁜 놈인데, 이제보니 링크 역은 <하이스쿨 뮤지컬> 시리즈의 트로이의 인기와 후광에 덧댄 배역이지 싶다. 이 녀석과 여자친구 가브리엘라 역의 바네사 앤 허진스가 함께 듀엣을 하는 장면이 많은데, 그때마다 청춘의 첫사랑을 진하게 앓는 녀석들 특유의 반짝반짝한 빛과 수줍고 달뜬 열정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눈이 아주 반짝반짝 빛나며 진짜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과 웃음과 표정이 나온다. 그래서 더욱 영화가 예쁘다. 아니나 다를까, 둘은 실제로도 사귀는 사이란다. 사라 미셀 겔러(버피!)를 살짝 닮은 샤페이 역의 애쉴리 티스데일은 고난도의 완숙미를 선보여야 하는 쇼 뮤지컬 장면을 그만하면 썩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컬킨 가 아이들을 살짝 닮은 라이언 역의 루카스 그래빌도 살짝 게이삘을 내보이며 훌륭한 쇼맨쉽을 펼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강추! 결론은 쇼 머스트 고 온!

2009/02/02 23:41 2009/02/02 23:41

Doubt

그러니까 영화의 줄거리가 아무리 소박해도, 불꽃튀는 배우 둘(... 셋이기도 하고...)을 붙여놓으면 이렇게까지 스펙!따!끌! 해질 수 있다는 거. 게다가 이 정도면 연출도 아주 좋고. 원래 연극인 작품, 꽤 훌륭하게 영화로 옮겨놓은 건데, 정말 배우들이 훌륭하시니 영화가 번쩍! 번쩍! 막 광채를 발한다. 오죽하면 영화 끝나고 우연히 만난 다른 매체 기자랑 같이 본 우리 객원기자랑 해서 한 시간이 넘게 수다를 떨고 앉았어, 영화 감탄하느라;;; 원래 메릴 스트립은 거의 매년 아카데미상에 그저 예의차 후보가 올려지는 편이었지만 이 작품에선 정말 고개가 절로 흔들릴 정도로 미친 연기를 선보이신다. 케이트 윈슬렛이 못 타도 앤 헤써웨이가 못 타도 메릴 스트립이 오스카 여우주연상 가져간다면 내 두말 못 하고 그냥 닥치고 박수칠 거다. 게다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앙앙앙 우리 곰돌이 아저씨 어쩜 여기서도 그렇게 연기를 잘 하시나효. 이 아저씨 아무리 표정은 순둥이에 이따만큼 배나오고 해도 걍 막 왕쎅시 왕귀염일 수밖에 없다능. 연기를 이렇게 잘 하시는데. 게다가 젊은 수녀 에이미 아담스도 참, 발군이더라. 거기에... 난 사실 밀러 군의 어머니가 짧게 한 씬에서 나오는데 길 걸으면서 메릴 스트립과 대화나눌 때 우와, 정말 뻑 갔다. 그러니까 진짜 타짜인 배우가 진짜 제대로인 연기를 선보일 때 가슴 한줄기에 서늘하게 바람이 부는 거, 이 영화에선 어째 한 씬 조연이 나올 때도 부냔 말이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게, 아마 이 아줌마도 골든글로브에선가 조연 후보에 올랐었지, 단 한 씬인데. 사람 눈이 다 거기서 거기구나 싶기도 하고. 한줄기 눈물 주룩 흘리면서 뭐라뭐라 말하는 그 장면 진짜, ...

영화 내용도 사실 상당히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그러니가 뭐야, 확신과 의심과 의지 사이에서 사람 일이란 게 이럴 수도 있구나 싶은 게. 난 이 영화가 끝내 바로 그때 그 사건을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게 탁월한 선택이었고, 실은 그거야말로 이 작품의 본질이었는데 영화로 매체가 옮겨지면서도 그 본질을 잘 지켜냈다고, 진짜 막 감탄하고 박수치고 싶다. 그래, 지 믿고싶은 대로 믿는 게 사람인기라. 난 여전히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메릴 스트립의 그 마지막 장면, 그 울음 터뜨리는 장면은 진짜...

아아 제발 두르두르들 보고들 배우셈. 이런 각본은 진짜 닥치고 배워야 한다. 고맙습니다, 여러분들, 이런 영화를 보여주셔서. 전 이 영화로 오늘 하루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ps. 김혜자 주연으로 국내에서도 막이 올려진 적이 있다. 확실히 마지막 장면에서 부감숏으로 그렇게 끝나는 건 연극 원작답더란.

2009/01/31 03:46 2009/01/31 03:46

대체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제발 이 따위 필름뭉치를 '영화'랍시고 만들지 말아달란 말입니다. 그건 영화에 대한 모독이라고요.

마린보이

가뜩이나 수면부족에 시달리는데 내 이 따위로 시간낭비해야 쓰겄나.


아니 뭐 처음 40분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 조금 껄렁할락 말락하는 김강우가 딱히 나쁜 것도 아니었고 참 필사적으로 이쁜 척한다 싶긴 했는데, 딱 박시연 등장하고서부터 어째 장면들이 죄다 헐리웃 누아르를 참 쉽게쉽게 그것도 참 쌈마이로 모방한다 싶었지만 그래도 아니 뭐 그래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싶었다. 근데 이건 뭐 가면 갈수록 대체 이런 괴상하기 짝이 없는 필름 뭉텅이를 진지하게 영화랍시고 만들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놀라움에 이 싸람들이 장난하나 허탈한 웃음까지. 조재현이 참 욕 봤다. 사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조재현이다, 아 그 절절한 순애보라니 ㅠ.ㅠ 이원종도 나쁘진 않았는데 절정에서 이원종이 우스워진 건 이원종의 연기가 아니라 연기 연출을 괴상하게 해댄 감독의 잘못이다. 야, 원래 광기에 찬 캐릭터라 배우는 광기에 차서 돌아가는데 그 순간에 코미디가 하고 싶냐? <하피>의 뒤를 이을 진정한 괴작이로구나. 민규동 감독님 미안해요, 아무리 애정어린 차원이었다곤 하나 <앤티크>를 괴작이라고 불렀던 건 제가 뭘 모르고 한 짓이었어요, 아니 전 정말 이런 수준의 영화가 나올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을 못했다니깐요.

장난하지 마라. 영화가 장난이가? 몇십억 들여 만들어 다시 몇십억 들여 홍보하는 상품이, 장난이가?

2009/01/31 03:32 2009/01/31 03:32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케마님 만세여요 ㅠ.


F. 스콧 핏제럴드와 데이빗 핀처라니 이게 대체 어떤 조합이야, 가능하기는 한 조합이냐, 이러면서 궁금해 죽을 지경으로 두근대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드디어 시사회를 가서 봤는데, 어머나, 전날 밤에 imdb 찾아보고 조금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원작에서 그냥 80세 노인의 몰골로 태어나 나이를 거꾸로 먹다가 갓난아기로 죽는 벤자민 버튼, 이라는 설정만 딱 가져오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다. 주요 기둥은 그가 데이지([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 이름이 바로 데이지다. 물론 영화에서의 성은 책과 달리 뷰캐넌이 아니라 풀러이지만)라는 여자와 평생에 걸쳐 나누는 사랑 이야기인 셈인데 이 사랑 이야기가 나는... 미칠 듯이 좋았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나 이런 데에서 그냥 피상적으로 다루는 일생의 단 한 명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사랑 운운이 아니라, 가장 완벽한 형태의, 서로 완전히 신뢰하고 아끼며 우정에 기반하면서도 불꽃을 가진 바로 그런 사랑이다. 그래서 이들이 사랑의 절정을 맞는 것도 20대가 아니라 40대가 되어서고. 하지만 뭐 어린 데이지가 침대 밑에서 노인 몰골의 어린 벤자민의 뺨을 만지던 그 짧은 순간도 무지 로맨틱하고 예뻤다. 늙은 데이지가 갓난아기 벤자민을 품에 안고 있는 장면도, 그 갓난아기 벤자민이 할머니 데이지 품에 안겨 생의 마지막 눈을 감는 장면도 눈물이 절로 나왔다.

이 영화의 색채는 사실 내가 핏제럴드의 소설들을 읽으며 느끼고 그렸던 색과는 많이 다른 편인데,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풍겨나오는 그 빛나는 로맨티시즘은 핏제럴드의 로맨티시즘에서 속물성과 시니컬함을 살짝 뺀 버전과 똑 닮았다. 그래서 더 빛나고, 아름답고, 황홀하다. 성인이 된 데이지가 처음 등장하는 데에서 데이지는 영락없이 [위대한 개츠비]의 그 속물적이고 얄팍한 데이지와 똑 닮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달라진다. 핏제랄드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묵직한 진지함이 벤자민과 데이지에게 스며든다.

당연히도,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사랑만은 아니고, 실은 삶과 죽음의 교차이다. 원작과 전혀 달리 벤자민 버튼은 친부한테서 버려져 양로원에서 자라게 되는데, 이크 양로원이 어딘가.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곳 아니던가. 애초 영화의 시작부터 죽음을 눈앞에 둔 데이지의 회상으로 시작하면서 이 영화에는 끊임없이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죽음이 삶의 일부임을 조용히 웅변하고, 그리고 인생의 이런저런 순간들이 얼마나, 정말 얼마나 빛나는 순간들인지 절절하게 그려내는지라, 이 영화만한 '삶의 찬가'도 보기 힘들겠단 생각이 든다. 실제로 벤자민 버튼은 나이를 먹으며 점점 빛나는 젊음을 얻어가고 그간 인생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바탕삼아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낸다. 반면 데이지는 교통사고 이후 꿈을 접고, 한없이 빛나는 육체를 가진 벤자민 앞에서 자신의 늙은 육체를 부끄러워 하는데, 아이고, 그 절절함과 애잔함이 못내 마음 아프면서도, 원숙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데이지의 모습이 또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면서, 치매를 겪으며 '아이'가 된 벤자민을 거두는 그녀의 손길의 그 따뜻함이 스크린을 보는 나한테까지 온몸으로 전해지면서, ...

사실 나는 퀴니가 처음 등장해 벤자민을 향해 첫 대사를 칠 때부터 그냥 눈물 펑펑펑이었는데, 퀴니 역의 타라지 P. 헨슨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고 백배 동감을 했다. 그냥 퀴니 언니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완소 감동 대사들이라능. 2시간 46분, 꽤 긴 러닝타임에 중간에 살짝 지루한 부분도 없진 않지만, "내 인생은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말그대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그깟 세 시간에 보는 거면, 짧게 보는 거지. 그냥 이 영화는 논리적으로 어쩌고 저쩌고 떠들기보다 그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느끼는 수밖에 없는 듯. 큰일이다, 리뷰를 쓰려면 아무래도 개봉 전에 한 번 더 봐야겠다. 하여간에 결론은,

핀처행님 만세! 케마님 만세! 핀처행님 짱이에요 케마님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주시다니 엉엉엉

2009/01/31 03:13 2009/01/31 03:13

작전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들만큼 폼재며 살고 싶은데 가진 밑천이 너무 없을 때, 사람들은 종종 도박이나 복권의 유혹에 빠진다. 그 도박의 종목이 옛날엔 투전이었고, 고스톱이었고, 포커였고, 이젠 주식이 됐을 뿐이다. 아무런 생산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허수의 돈을 사고파는 주식시장, 그리고 그 바닥에서의 '타짜'를 다루는 영화. 그러니까 결국 <작전>은, 종목이 주식일 뿐인 도박 범죄영화다. 한 탕 크게 하기로 하고 작전을 세운 한 팀의 인물들이 각자 딴 궁리를 하며 제 주머니를 챙기려 하고, 그래서 배신과 배신의 틈바구니 와중에 목숨과 운명이 왔다갔다 하는. 일견 복잡해 보이는 대결구도도 결국 악당 박희순 대 우리편 박용하로 심플하게 정리된다. 그러니까 결국, 화투패 모른다고 <타짜> 못 보는 게 아니듯 주식 모른다고 <작전> 못 보는 건 아니라는 거. (나도 주식은 전혀 모른다.) 굳이 캐릭터에 억지로 힘을 주지도 않고 착한 척 포장하지도 않고 담백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간다. 악당이라고 그냥 평면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결국 주식시장에서 중요하기 짝이 없는 게 '타이밍'인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전형적인 장르영화의 플롯에 심플한 대결 구도 속에서 배신과 공격과 방어를 언제 하느냐, '타이밍'이 관건이 된다. <작전>은 신인감독치고는 무난하고 적절히 긴장을 잃지 않은 채 플롯을 풀어나간다. 때로 카메라가 답답한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큰 흠은 아니다. 최동훈 감독도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에서 신인감독다운 자잘한 실수를 했으니까. 뭐 이만하면 세련된 범죄영화고, 주목할 만한 데뷔작이다.

'껄렁한' 박용하가 의외로 잘 어울리고, 비열하고 경박하면서도 무서운 악당 박희순은 역시 기대대로 아주 좋다. 뮤지컬계에서 각광받다가 드라마 한 편(<일지매>)을 거쳐 영화에 입성한 '뺀질한' 김무열도 그만하면 데뷔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그런데 처음 티저 포스터 풀렸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박용하가 대체 언제부터 짝퉁 지현우가 됐나염.

2009/01/30 03:54 2009/01/30 03:54

東京マ-ブルチョコレ-ト

하나의 사건을 그 남자의 관점, 그 여자의 관점으로 다시 풀어주는 게 언제적 유행인데 이걸 또... 귀에 적당히 달달한 J-Pop에, 알콩달콩하면서도 수줍고 소심한 자신감 없음을 표하는 캐릭터들에, 별 사건 없이 그런 식의 소소한 감성을 그렇게 일일이 세밀하게 그러나 상당히 순정만화스러운 터치로 그려내는 방식까지, 확실히 '감수성 예민하다'고 자처하는 십대들이 좋아할 만하겠다 싶다. 내게는 그냥 거대한 뮤직비디오로 보였다. 뮤직비디오, 좋지, 짧은 건. 장편 애니메이션치곤 짧은 55분이지만, 뮤직비디오로는 끔찍하게 길다. 결정적으로 노래들도 내 취향이 아니다. 딱, 포스터에 나온 공중부양 그림만큼은 참 예쁘더라만. 숨겨놓은 나의 1인치 소녀감성이 오늘 이 영화엔 반응하지 않았다.

2009/01/16 16:49 2009/01/16 16:49